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시인을 가리켜 ‘무당 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무당 기’는 작가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당당하게 읊어내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고라’로 불리는 광장에서 온종일 문학과 철학을 토론했고 시인의 낭송을 들었다. 그 시절에 문학은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기쁨이었다.
10일오후 서울 마포구 홀리데이인 서울 호텔에서 한국소설가협회 주최로 ‘문예부흥을 위한 소설낭송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문학 독자들에게 ‘소설 낭송회’는 낯설다. 시를 읊는 모임은 자주 열렸지만, 소설을 낭송하는 행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운율이 담긴 시어(詩語)와 달리 소설의 문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부속품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날 사회자인 이기윤(52) 소설가협회 사무국장은 소설 낭송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소설 낭송을 낯설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전혀 낯선 게 아닙니다.러시아 문학사만 해도 낭송을 빼면 알맹이가 다 빠져버릴 정도입니다.
고골리나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작품도 낭송을 통해 발표되고 토론과 비평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와독일 등 서구 곳곳에서는 신간 소설이 나오면 작품 낭송회가 먼저 열리고, 독자들이 입장권을 구입해 책을 ‘듣는다’.
자국작가뿐만 아니라 세계의 작가들을 초청해 낭송회를 열기도 한다. 작품 낭송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거리 곳곳에 붙여지고 도시 전체가 책 읽는 소리로 가득하다. 유서 깊은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의 지난 해 슬로건은 ‘라이프치는 지금 책을 읽고 있다’였다.
일찍이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미국에까지 건너가 소설 낭송회를 개최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독일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정기적인 낭송회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소설을 읊으면서 독자들과 예술세계를 나누는 서구 문화에 부러움을 품었던 한국의 소설가들이 서울 중심가에 모여 ‘소설낭송회’를 연 것이다.
“소설낭송회가 한국 르네상스 운동의 문을 여는 게 아닌가 싶다”고격려사를 전하는 이원홍(72) 전 문공부 장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이날 첫 낭송 작품은 소설가 정을병(67)씨의 단편집 ‘꽃과 그늘’. “처음으로 개최하는 행사인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있어, 소설가협회장인 내가 떠맡기로 했다”는 정씨의 인사에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60)중앙대 교수는 “정을병씨의 소설은 주제의식도, 문체도 남성적이어서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이런 특징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게 낭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곧이어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면서 낭송이 시작됐다. 수필가 임마리아(41)씨가 정씨의 작품집에 실린 단편소설 ‘인생은 스코어가 아니라 존재다’의 한 부분을 골라 읊었다.
“우리 동네에 의사 부부가 살고있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병원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았다.
그들은 가정부에게 아이를 맡기고병원 근무를 계속했다…” 문학으로서의 소설을 그저 한번 보고 덮어버릴 수 없는 것은 삶 체험에서 나오는 공감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가다가 어느 문장에서 멈칫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때가 소설에 대한 이 공감의 순간이다.
KBS성우 이규석(28)씨가 낭송한 ‘죽은 자와의 5일간’ 중 “인생이란 감자 뿌리와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문장을 듣자,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소설가가 얻은 귀한 진리를 깨닫고 청중은 숙연해졌다. 인생은 감자 뿌리와 같은것이다.
뽑아놓고 보면 쓸 만한 감자가 조금 달려 있기도 하고, 먹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는 감자가 달려 있기도 한 법이다. 그런 것이 인생 아닌가.
소설가 이은집(59)씨가 TV드라마 ‘여인천하’를 패러디한 익살스러운 축사를 읽자 150여 명 참가자들의 진지한 표정에 웃음기가돌기 시작했다.
“경빈은 복성군을 세자 책봉하는데 들일 시간이 있으면 마포에서 열리는 소설 낭독회나 가 보라”는 대목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축사에 이어 정씨의 단편 ‘생으로 부터의 자유’를 읊은 이씨는 예정됐던 낭송 부분을 몇 줄이나 넘겨 읽었다. “마음 같아선 작품 전체를 다 ?f고 싶다”며 이씨는 낭송을 맺었다.
성우 김정아(26)씨와 이규석씨가 ‘남과 북-그 흘러가는 이야기들’의 일부를 번갈아 읊는 ‘입체 낭송’ 순서가 지난 뒤, 저자인 정을병씨가 마이크 앞에 섰다.
저자가 고른부분은 표제작 ‘꽃과 그늘’ 중 마지막 한 장이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의 보상 신청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는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이들 중 꽃이 된 사람도 봤고, 그늘이 된 사람도 있는 것을 보았다.
정씨는 결과보다는 과정의 소중함을, 꽃보다는 뿌리나 그늘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싶어했다. 그가 읊는 자신의 작품에 이런 소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다행스럽게도 수많은 희생자들 덕분에 이 어려운 나라에도 민주화가 찾아온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들이 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그늘 속의 뿌리 없이 어떻게 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글쓰는 사람은 화려한 꽃보다는 늘 그늘과 뿌리 편이다.”
낭송회는 작가와 독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이날 첫 낭송회는 동료와 선후배 작가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앞으로 소설을 들으러 오는 독자가 늘어나 ‘독자와 작가의 만남의 장소’로 커나가길 소망한다고 소설가협회는 전한다.
첫 모임에 이어 10월 10일 서울 마포구 마포동 이원문화센터(02-6356-6679)에서 두번째로 윤후명씨의 소설집 ‘가장 멀리 있는 나’의 낭송회가 열린다.
11월 9일에는 김선주 소설집 ‘제로섬 게임’, 12월10일에는 백시종 소설집 ‘그 여름의 풍향계’로 낭송회를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02)703-9837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국내 시 낭독회 현황
“시는 본래 말이다. 말에는 뜻과 소리가 있으나, 이즈음의 시는 소리의 기능을 잃었다. 시 본래의 소리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육성으로 시를 낭독한다.”
원로시인 구상 성찬경 박희진씨 등이 주축이 된 ‘공간시 낭독회’는 1979년 4월 발족하면서 이런 취지를 내세웠다.
‘읽는시에서 읊는 시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공간 시 낭독회는 국내 최초의 시 낭독 모임이었다.
낭독회 장소는 그간 서울 비원 옆 지하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대학로 바탕골소극장, 올해 3월부터는 다시 북촌창우극장으로 바뀌었지만 22년 넘게 낭독회를 계속하며지난 8월로 254회 모임을 갖는 기록을 세웠다.
조병화 정한모 김종길 김남조 홍윤숙 황금찬 김광림씨 등 저명한 시인들이 모두 이 낭송회를 거쳐갔다.
공간 시 낭독회가 표방한 대로 시 낭독회는 읽는 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리혹은 노래로서의 시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시인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갈수록 난해해져 오히려 독자를 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현대시의 함정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모임을 시발로 수많은 시 낭송회가 생겼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한국시문화회관에서 1987년 이후 매주 토요일 열리는 시의 축제 ‘꿈과 시- 토요문학행사’도 전통있는 시 낭송회다.
매주 특정 시인을 초청해 독자들이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대화를 나눈다. 우리 시단의 얼굴들이거의 모두 이 모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우이동 시인들’의 활동도 빼놓을수 없다. 이생진 임보 채희문 홍해리씨 등 북한산 자락의 서울 우이동에 모여 사는 시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발적인 시 낭송 모임을 만들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이들은 도봉도서관에서 낭송회를 열어 ‘동네 사람들’과시 읽는 즐거움을 나눈다.
매월 소식지를 내고 해마다 2차례 정도 동인 시집도 낸다.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암송하거나 노래부르고 싶어지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홍해리 시인의 말에서 시 낭송의 참 모습이 느껴진다.
하지만 모임의 수는 늘어났을지 몰라도 시 낭송회는 세태의 변화로 이전의 활력을 잃은 것이 사실이다.
일반 청중보다는 동료 시인들과의 만남의 장이나 동인 모임의 형태로 축소된 것이 현실이다.
노시인 박희진씨와 이생진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인사동 카페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매월 마지막 월요일 오후 7시 ‘2인 시 낭송회’를 열고 있다.
한꺼번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해 집중도가 떨어지는 기존 시 낭송회의 한계를 탈피해보려는 시도라고 박씨는 말했다.
이생진 시인은 “시로부터 멀어지는세상, 특히 젊은 세대와의 교감을 위해 시 낭독회는 더욱 적극적이고 다문화적인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말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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