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럽 예컨대 특히 프랑스의 경우,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신도시가 아니라면대개 도심에 길이 좁아 차량 통행이 금지된 구시가가 있게 마련이며 그 중심에는 예외 없이 (대)성당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 성당들은 지역에따라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개 뾰족탑을 갖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현존하는 고딕양식 건축물의 대표작들, 이를테면 아미앵, 랭스, 샤르트르,파리, 앙 등의 대성당들은 모두 몽골인들이 동유럽을 휩쓸던 시기를 전후하여 초석이 놓여졌으며 신과 영원을 향한 덧없는 인간들의 염원과 함께 종교권력,특히 교회권력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딕양식이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시기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로마 교황의권력과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바꿔 말하면 몽골인들이 1237년에 폴란드 지역에서 유럽연합군을 격파했을 당시 교황은 유럽을 실질적으로대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기에 ‘타타르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리용 공의회를 소집했던 것도 교황이노켄티우스4세(1243-54)였으며, 몽골 진영에서도 교황을 유럽 최대의 실력자로 대접했다.
봉건제의 본고장인 파리 지역(일드프랑스)의 문화적 우위를 보증하는 고딕양식의전성기와 유럽 정체성의 종교적 토대를 마련한 교황권의 절정기가 일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양자는 분명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서임권투쟁’을 통해 교황권의 위상을 한껏 높였던 이노켄티우스3세(1198-1216)는 로마 귀족가문 태생으로서 파리 유학생이었으며 소르본 시절에 배운 신학이론을 원용하여 교황권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 시기의 일치는 보다 더광범위한 현상, 즉 11세기 중엽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각기 다른 차원에서 반영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인구의 증가, 도시의 성장, 원격지 교역의 발전, 문화적 저변의 확대와 대학의탄생, 화폐경제의 등장 등 탁월한 중세사가가 ‘대개간의 시대’라고 불렀던 이 두 세기 동안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일으키는 데 교회는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결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숲의 개간은 장원경제의 틀을 벗어난 수도원 운동을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부의 축적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식체계는 속인들의 생활을 도덕적으로 통제하는 정책을 세울 수 있게하는 한편에 기존의 가치에 도전하는 반대자를 낳았다.
화폐 유통의 확대는 종교적 관행에 ‘타락과 부패’의빌미를 제공했는가 하면 장기적으로 대규모 교회 건축과 국제적인 종교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딕 성당과 교황권은서양 중세 성기(盛期)가 발전한결과이자 그 극적인 표현물들이다.
흔히 로마 교황하면‘영원한 도시’로마를 대표하는 만큼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직후부터 서구 기독교세계의 수장 노릇을 했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로마교황청의 역사는1,500년이 넘는 응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제국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권력의 공백을 종종 카톨릭교회가 메우기는 했지만 로마교회의 우두머리는 단지 로마의 주교였을 뿐 첫 번째 천년기의 후반기에 서방 기독교세계를 대표할 만한 역량이나 위치에 있지 못했다.
로마의 주교가 로마 교황이 되려면동ㆍ서 교회의 분열이 먼저 이뤄졌어야 했다. 결국 교황권을 확립하려는 시도와 정교ㆍ가톨릭의 분열이 동시에 일어났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전까지 가톨릭의 기본적인 종교단위는 주교구였다. 11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은 분명 따로 존재하고 로마의 주교가 ‘주교들의 주교’였지만 종교적 서열제도는아직 없었다.
마치 통치권이 분산되어 있던 봉건적 권력구조가 종교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특정 가문의 소유물이기 십상이었고 로마의 주교를 포함한 종교적 수장들의 선임권은 세속 제후들이 장악하였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지적 수준이 낮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1세기 중엽 그레고리우스7세(1073-85)로대표되는 ‘교회개혁’은 교회가 경신성의 담지자이기를 바라는, 도시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회세력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교황은 성직자의 임명권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보고 로마의 주교를 교회가 독자적으로 선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나머지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놓고 황제와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장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수도원장들이었다. 각 수도원장을 독립적인 주체로 보았던 베네딕트 수도회와는 달리, 신생 클뤼니 수도원은 일종의 단일지도체제를 지녔고 이러한 새로운 수도원제는 이후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수사_교황이 매우 드문 교회사에서 1073년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모든 교황이 수사 출신이었음은 수도원 운동이 교황권의 확립에서 차지하는 시원적 역할을 잘말해준다.
로마 교황이 교회를세속군주로부터 독립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고 결국은 타협으로 귀착되었다.
돌이켜 볼 때, 카톨릭 교회가 독자적인 계서제를 설정하고 1세기에여러 세속 군주들에게 자못 우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시적으로 나마 절묘한 상황이 조성되었던 결과이다.
즉 교황의 가장 강력한 경쟁세력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이 급속히 악화되면서도 그 힘의 공백을 국민국가의 원형이랄 수 있는 영방국가가 아직은 메우지 못했던 틈새 속에서 로마교회는‘국가 안의 국가’이자 ‘국가 위의 국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유럽사에서 국가_시민사회라는 이중구조의 기본틀이 이렇게 해서 나타났다.
이렇게 볼 때,진정한 의미에서 로마교황청은 12세기에 탄생하였다. 1130년대에 이르러 교황을 선출하고 또 그의 특사 역할을 하는 추기경단이 등장했고, 알프스 이북의 왕정청(Curia Regis)을 연상시키는 독자적인 행정기구인 로마교황청(Curia Romana)이 마침내 출현하였다.
교황은 1200년현재 800개에 달하는 기독교세계의 모든 주교구를 통괄하게 되었고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를 비롯한 일련의 공의회를 통해 예배의 의식을 통일하여 가톨릭의 정체성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보편적인 기독교세계’의 구축을 위해 절정기 교황들이 구사했던 도구는 십자군과 개혁이었다. 일반민중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하는데 탁발교단들이 큰 역할을 했고 내부선교를위해 민중적 형태의 설교가 유행하였다.
‘개혁’을 향한 교회의 열정은 ‘이단’을 만들어냈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내부개혁과 십자군 및 종교재판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기독교를 신자들에게 내면화하려는 교황의 시도는 당장에는 실패로 끝났다. 대내외의 십자군과 교회의 개혁은 좌초했고 국가교회주의가 대두하였다.
교황의 ‘아비뇽유수’(1309-76)와 ‘교회의 대분열’(1378-1417)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중세 교황의 염원이 현실화되기위해서는 ‘종교개혁’의 시기(16세기 초)를 기다려야 했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지하성당 예레바탄 사라이- 버려진 기중 재활용…문양도 각양각색
이스탄불 소피아 사원 길 건너편에는 마치 지하철로 들어가는 듯한 계단이 있다.그 아래로 내려가면 거대한 열주와 서늘한 공기가 사람들을 반겨 맞는다. 바로 ‘지하궁전’이라는뜻의 ‘예레바탄 사라이’.
이곳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때 규모로 비잔틴 제국을 키우려 했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483-565)가 세운 지하성당이다.
바닥에는 맑은 물이 종아리 정도의 깊이로 찰랑거리는데 그 위로 거대한 기둥이 줄을 지어 서있다. 기록에 따르면 기둥의 높이는 8m, 개수는 366개라고 한다.
도리아나 코린트 양식의 기둥은 신기하게도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같은 배흘림 기둥이라고 보면 바닥이나 천장의 문양이 완전히 다르다.
올챙이(페이즐리) 무늬로 가득찬 기둥도 있다. 거대한 메두사의 머리를 밟고 서있는 기둥도 2개나 있는데메두사 머리가 하나는 정수리를 바닥에 대?있고 하나는 귀를 바닥에 대고 있어 이 조차 똑같지가 않다. 물론 메두사의 표정도 두 개가 다 다르다.
이 곳이 이렇게 각기 다른 기둥으로 가득찬 것은 이 건물을 짓게 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재활용’에 남다른 황제였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도 유명한 이 황제는 제국의 영향력을 그리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까지 넓혔으며 정치도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건축에도 관심이 있어 소피아 사원이 바로그 시대의 작품. 그런데 그는 건축물을 세우면서도 되도록이면 있는 물건은 그대로 재활용했다.
소피아 사원 역시 그리스 시대의 건축물 위에 재건되었으며이 지하궁전 역시 제국의 곳곳에 버려진 기둥을 모아서 건축되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 않는 건물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세금과 노동력을 수탈한 결과일까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건물만은 유쾌한 기분으로 볼 수 있다. 농민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알았던 것일까.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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