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랄프 코사 미국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퍼시픽 포럼 소장, 노다리 시모니야 러시아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박한식(朴漢植) 미 조지아대 세계문제 연구센터 소장과 함께 한반도 정세와 남북문제를 진단했다.5일부터 7일까지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진행된 평화포럼(이사장 강원용ㆍ 姜元龍) 주최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국제학술회의 참석차 방한한 이들은 좌담에서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북방 3각 관계 및 북미관계 전망, 북한체제의 변화 가능성,햇볕정책의 미래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박한식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좌담은 6일 오전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이뤄졌다. / 편집자 주
▼랄프 코사 소장은 북미대화에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전제조건 없는 대화제의에 대해 북한이 답을 내놓을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제임스 켈리 현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최근까지 소장으로 있었던 퍼시픽 포럼은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싱크탱크이며, 코사 소장은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등에 관한 입장을 한국과미국 언론에 기고해온 학자이다.
▼노다리 시모니야 소장은 러시아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행사하고 있는 IMEMO의 노다리 시모니야 소장은 한반도의 포용정책 추진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남북경제협력의 중요성을지적했다.
▼박한식 소장은 3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해북한 당국의 정서를 깊숙이 파악하고 있는 박한식 소장은 북한체제가갖고 있는 대미 불신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미국 내 한인 정치학자로서는 드물게 민족분단 문제에 천착해 온 박 소장은 한 때 친북 인사로 분류되기도했었다.
■ 박한식
북미대화가 한동안 단절되고 있다. 미국은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 랄프 코사
이제 공은미국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다. 미 행정부는 포괄적 토론을 북한과 조건없이 하고 싶다는 입장이다. 사실 미국보다는 북한이대화를 더 필요로 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적으로 삼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굳이 친구로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 노다리 시모니야
나는 북한 내에 어떤 변화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주민과 당국자들의 멘탈리티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북중, 북러 정상회담의 목표 중 하나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남한 및 미국과 대화하도록유도하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더 이상 고립된 국가를 운영하려 하지 않는다. 햇볕정책 추진에는 상당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시련도 있을 수있다. 미국이 대화의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는 북한의 주장은 불합리 하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미국과 남한 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도 고려해야 한다는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주민에게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 박한식
북한은 처음부터 북미대화에서 미국의 주된 이해관계가 군비축소에 있다고 보고 있다. 전제조건이 없다는 미국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특히 미국이 북의 지도자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후 북한의 믿음은 약해졌다.나는 지난해 북한 당국자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발언을 들었다. 당시 북한은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았던 것 같다.
■ 랄프 코사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대해 ‘회의(skeptical)’를 표시한 것에 대해 북한은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부시 대통령의 말은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존중받기 위해서는 존중받을 행동을 하라는 취지였다.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 박한식
최근의 북러, 북중정상회담은 2차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 노다리 시모니야
이들 정상회담은 향후 남북간 프로세스를 가속화하는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2차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매우 진지하게 권유했던 것으로알고 있다. 하지만 남북간의 프로세스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햇볕정책이 이미 경제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최근남북이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연결을 위한 실무협상을 벌이고 있다.
■ 랄프 코사
언론들은 江 주석이 북한에 대남, 대미, 대일 대화재개를 권유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모든 나라는 자신감이 없을 경우 대외협상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상식을되새길 필요가 있다. 남한 역시 주한미군으로 인해 안보상의 우려가 없으므로 대북협상에 나설 수 있듯이, 북한 역시 자신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북한이 전통적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의 지지를 얻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의미가 있다.
■ 박한식
군축, 핵 등의 현안에 있어 북한의 입장은 자주성 견지라는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자주성, 즉 자위의 문제는 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개혁정책에 대한 전망은 어떤가.
■ 노다리 시모니야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체계가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모든 사람들이 고르바쵸프 집권 때 붕괴가 개시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부패로물든 소련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북한이 곧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바뀔 수 밖에 없고,그러나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랄프 코사
변화의 씨앗은 이미 심어졌다. 김 위원장의 상하이(上海) 방문을 계기로 국가 통제하의 개혁을시도할 것이라는 조짐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지도자의 용기와 리서십이다. 고르바쵸프와 덩샤오핑(鄧小平)은 용기가 있었고 위험을 감수했다.문제는 김 위원장이 얼마나 전진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그가 이미 (개혁 개방 정책의) 멍석을 깐 것은 맞다. 하지만 그는 중국이나 소련보다도 훨씬 신중하게 일을 추진할 것이다.
■ 박한식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실행이 지연되고 있다. 북한은 경수로 공사가 지연되는데 대해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 랄프 코사
북미 양측 모두 기본합의서 이행에는 확고한 입장이다. 북측은 자신들이 한 약속을 지켜 왔다. 이는 북한은미국을 수용(engage)했고, 이는 50만톤의 중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경수로 완공 때까지 매년 중유를 지원받기 때문에 공사지연에 따른추가보상 문제는 없다고 본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요구를 완벽히 이행하지 않으면 공사는 계속 지연될 것이다. 기본합의서에 따르면,핵심부품이 도착하기 전에 과거 핵에 대한 사찰이 완료돼야 하는데, 이 사찰은 최소 3년이 소요된다.
■ 박한식
북한은 영변 시설을 IAEA 사찰단에게 공개하는 등 합의사항을 이행해 왔다. 그러나 미국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더 많은 사찰을 원한다는점에 불만이다. 특히 미국은 의혹 시설인 금창리 지하시설의 사찰을 원했다. 이러한 상호 불신이 (북한의 과거핵 규명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 랄프 코사
금창리 사찰은 미국이 기본합의서를 적절치 않게 적용한 것이다. 다른 매커니즘을 따라야 했었다. IAEA 규정을 완벽히 따르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기본합의서에 서명한 북한의 의지를 확인할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련법은 북한과의 핵 협력에 대한 구체적 사항을 명시하고 있다. 핵 관련 부품이 북한으로 반입되기위해서는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북한이 완벽하게 IAEA 규정을 이행한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미 의회의 승인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미국의요구가 아니라, 북한이 IAEA에 가입하며 스스로 약속한 사항이다.
■ 노다리 시모니야
나는 KEDO 프로젝트에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KEDO는 미국과 서방이 1994년 위기상황을 모면하고 러시아의 대북 경수로 제공을 막기 위해 급조된 기구다. 내가 받은 인상은, 미국은 북한붕괴 시나리오를 전제로 합의서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KEDO에) 러시아가 참여하면 상황이 좀 나아 질 수 있고, 북한이 좀 더 수월하게IAEA 요구를 들어줄 것이다.
■ 박한식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실현되더라도 미사일이나 재래식 군사력 문제 등은 남는다. 제네바 기본합의를 부분적으로 대체할 좀 더 포괄적인 합의서의 채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 랄프 코사
재래식 무기문제에 있어 최상의 접근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기반하는 것이다. 4자 회담의 신뢰구축소위(confidence-buildingmeasures subcommittee)도 하나의 채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핵이나, 미사일에 대한 재래식 무기 이야기를 ‘백지상태’에서 전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른 사안들에 영향을 끼친다.
■ 박한식
임동원 장관의 사임으로 햇볕정책의 미래가 다소 불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와 관련 한국 내의 우익 민족주의적인 사고의 부상도 주목할 만 하다. 이와 관련된 최근 야당의 행보는 한국인의 정서를반영한 현실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 랄프 코사
햇볕정책의 지속적 추진은 매우 중요하다. 햇볕정책에 대한가장 큰 위협은 워싱턴이나 평양이 아니라 서울에 있다. 한국 내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조율하는 모종의 틀이 있어야 한다. 워싱턴, 평양, 베이징을보고 변명할 거리를 찾거나 답을 구하는 시대는 지났다. 남한의 집안 내부단속을 해야 한다. 문제는 야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도 있다. 남측의 햇볕정책은상호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실제 추진과정에서 상호주의를 취하라는 압력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 노다리 시모니야
동감이다. 정책의 탄생 과정에서 문제가 있던 것이아니라 정책의 실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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