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부터 9월 7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에서는 유엔인권고등판무관(UNHCHR)실이 주관한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가 개최되었다. 사실 인종주의적 만행들이 자행된 2차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는1948년 대량학살범죄의 처벌과 예방에 관한 유엔협약이 체결되는 것을 시발점으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수많은 회의들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번에 열린 인종차별철폐회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첫째, 이번 회의가 탈냉전시대 국제정치의새로운 개념으로 ‘인간안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이다. 탈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과거 냉전시대의 국가안보개념에 비견되는 인간안보의 개념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인종주의는 인간안보를 중시하는 국가들에서는 냉전시대의 주적개념을 대신하여 새로운 ‘주적’의 하나로까지 취급되고 있다.
인종주의가 경제적 부의 불균형을 고착화시키는 것은 물론 인신매매나 장기매매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동원되는 추악상이 고발되기도 한다. 세계화로 인한 국제인구이동의 증대는 필연적으로 인종주의적 문제들을 증폭시키고 있고, 한국도 더 이상 그 무풍지대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둘째, 이번 회의가 인권과 주권의개념이 충돌하는 탈냉전시대 국제질서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냉전종식 이후 이념이 주권에 우선한다고 보았던 브레즈네프독트린이 사라진 자리에 인권이 주권에 우선한다는 신국제주의가 대두하였다.
교황의 국제적 권위에 맞서서 세워졌던 베스트팔렌적 의미의 국가주권이 보다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인권을 앞세운 나토의 유고개입이 이루어졌고, 중국이나 북한, 이슬람이나 인도와 같은 나라들은 서구적 인권개념의 유입에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150여개국 1만 5000여 고위급 인사들이 머리를 맞댄 이번 회의는 전세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국제적 인권레짐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인권적 표준을 주도해 온 ‘하얀대서양’의 시간적 이면에 존재했던 ‘검은 대서양’의 역사에 대한 책임규명과 보상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의 무차별적적용에 대해 몇몇 국가들은 “만찬에 초대되어 디저트 밖에 먹지 못한 사람이 식사비를 똑같이 부담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번 더반회의에서는 흑인노예문제를 중심으로 과거사문제가 제기됨으로써 현재의 국제관계에 얹혀져 있는 시간의 무게까지를 고려한 새로운 국제적 인권레짐을모색하는 장이 마련되었다. 통시적 공평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앞으로 아메리카대륙에서 코르테스와 같은 유럽의 정복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문명적 파괴행위로까지 이어질 전망이며, 다른 국제적 레짐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문제이다. 이번 더반회의를 통해 일본은 흑인노예문제에 대해 미국이 유감은 표시하되 공식적인 사과나 금전적배상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본을 지탄해온 대서양세계의 인권적 표준 역시 노예제라는 야만에 기초하고있다는 점이 국제적으로 폭로된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더반회의에서 독일의 외무장관 피셔가 나찌독일의 인종주의에 대한 참회의 수준을 넘어 과거 독일의 아프리카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물론 보상까지를 약속했던 다음과 같은 연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과거의 옳지 못한 행위를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떠맡는 것은 희생자와 희생자의 후손들이 빼앗겼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의미가 있다.”
김명섭 한신대 교수 국제관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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