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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李仲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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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李仲燮

입력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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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9월6일서양화가 이중섭이 서울에서 40세로 타계했다.이중섭은 평남 평원군출신이다. 그의 발은 그 뒤 평양, 정주, 도쿄, 서울, 원산, 부산, 제주, 진주 같은 도시들을 밟았다.

그 발걸음이 힘찬 적은 없었던 것 같다.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삶,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삶이 이중섭이라는 이름에 들러붙어 있는 이미지다. 그는 1950년 12월에 바닷길로 월남했지만,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선택이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것 때문에 친일파의 혐의를 받았음에도, 그리고 그의 내향성이 혁명의 열정으로 무장한 정권과 어울리지 않았음에도, 이중섭은 해방 공간을 북한에서 살았다.

그는 거기서 예술가동맹의 회원이 되었고, 원산 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없었다면, 이중섭은 원산의 영토 주권이 남북 어느 정권에 있든 그 도시에 살았을 것이다.

이중섭의 월남은 그의 예술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노동에는 별 취미가 없이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화가가 북한에 남았다면, 게으른 반동 작가의낙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섭은 그 행운을 가난으로 지불해야 했다. 그의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버린 것은, 애정으로 굶주림을 이기는 것이 누구에게든 힘든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중섭은 죽기 한해전, 처음이자 마지막이 돼버린 개인전을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열었다. 경찰은 거기 걸린 작품들 가운데 일부 은지화(銀紙畵)를 춘화로 판단해 철거하도록 했다.

너무 일찍 온 이중섭의 만년은 정신적ㆍ육체적 탈진의 세월이었다. 그는 정신병원을 오갔고,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망가진 몸에 술을 부어댔다.그는 망우리에 묻혔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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