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모스크바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모스끄비취까 백화점에서 정교 관련 용품들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조그만 성상을 하나 사려고 하다 무안을 당한 적이 있다.머릿수건을 한 얌전하게 생긴 여성판매원은 나에게 “정교신자냐”고 묻더니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팔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당시 나는 성스러운 종교적상징물을 관광객의 어설픈 돈푼 앞에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부심의 표현으로 여겨 말없이 그 자리를 물러 나왔었다.
러시아가 988년 정교를 택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역사, 문화,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정교회는 로마교회와 달리 선교, 예배, 성경번역 등 종교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민족고유어 사용의원칙을 택하고 있었다.
종교활동이 자국어만으로 충족되자 러시아인들은 필요한 신학관련저작들만 그리스어에서 자국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고,동로마에 보존된 다른 고전고대 문헌에는관심을 쏟지 않았다.
서구와 달리 러시아가 르네상스를 겪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도여기에 있다. 대신 러시아문화는 독자적 성격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지배 아래서 러시아 정교는 오히려 크게 발전했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감이 자기정체성의 종교적 표현인 정교에 대한 존중과 애착으로 연결되었음은 당연하다.
몽골제국의 관용적 종교정책도 정교의 세력강화에 기여하였다. 칭기즈칸은 샤머니즘의 신봉자였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를동등하게 존중하고 장려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금장한국은 14세기 중엽에 공식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지만 러시아인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교회 성직자들에게 면세혜택을 주었다. 일반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특권이었다.
몽골 치하에서 특히 활기차게 전개된 것은 수도원 건설이다. 모스크바 근교의 세르게이 삼위일체 수도원은 대표적인 예이며, 최북단 백해(白海)의 섬에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솔로베츠키 수도원도 몽골지배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그 후 러시아 역사의 온갖 극적 순간들을 몸소 겪어낸 현장으로유명하다.
수도원들은 자체 소유의 많은 토지를 농민들로 하여금 경작케하였는데, 러시아 농민은 ‘스메르드(악취나는 자)’라고 불리다가 몽골지배기부터 지금껏 ‘크레스치아닌’이라 칭해지고 있다.
이는 바로 ‘기독교도’라는 뜻이며, 수도사들이 휘하 농민들을 ‘신도’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데서 유래한 듯하다. 곧 러시아 민중은 정교신도와 동일시된것이다.
또한 몽골 지배기는 러시아 종교미술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체계적 신학은 형성하지 못했지만 성상과 종교건축분야에서는 비잔티움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 경지의 개척에까지 이르렀다.
이를테면 15세기 초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는 숭고하고도 우미한 정신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러시아인들은 고난을 승화시켜 미적으로 표현하는 데 특별한재능이 있는 민족이 아닐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곤 한다.
몽골 지배기 이래 정교회는 모스크바 정치권력과 밀착되면서, 국가의 강화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이는 교회의 생존전략이기도 했다.
러시아 교회의 수장은 키예프 수도대주교였는데 몽골 점령이후 수도대주교들은 키예프를 떠나 강력한 블라디미르 대공의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대공이 보호를 제공하고 수도대주교는 대공의 정치적 행보에 종교적 재가와 축복을 내려주는 공생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블라디미르 대공좌(大公座)가 모스크바로 옮겨감에 따라 정교회 수장의 축복도 모스크바 군주의 머리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동로마 교회가 교권과 속권의 협력을 중시하고, 교회문제에 통치자가 개입하는 전통을 가졌으므로 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대공의 비호 아래 권위가 높아지고 있던 러시아 정교회는 144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재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스크바 수도대주교를 선출함으로써 독립수장(獨立首長) 교회가 되었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절박한위기에 처한 동로마 황제가 서방의 군사적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교회_정교회 통합에 동의했던 데 대한 러시아측 반발의 결과였다.
러시아가 동로마보다도 더 단호히 로마교회_서방에 대립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뒤이어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러시아는 유일한 독자적 정교국가로서제국의 정신적, 정치적 후계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16세기초에 체계화된 ‘모스크바는제 3의 로마’라는 이념은 이러한 자부심의 집약체였다. 원래의 로마는 ‘이단’인 교황의 수중에 있고 두 번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은 로마교회와의 통합을 추진하다 벌을 받아 멸망했으니 진정으로 올바른 믿음(정교)의 수호자는 ‘제 3의 로마’이자혁신된 로마인 모스크바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모스크바 크레믈 안의 성모승천(우스펜스키) 사원이 바로 ‘제3의 로마’의 상징공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제 4의 로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모스크바가 영원한 번영을 누리리라는 이 주장은 모스크바 군주권의 강화에 크게기여했을 뿐 아니라 몽골지배를 극복하고 영토의 무한팽창에 나선 러시아인들의 선민의식을 극대화하였다.
러시아어에는 옛 모스크바에 있던 교회들을 가리키는 집합적표현으로 ‘마흔의 마흔 배’라는 말이 있다.
1,600이라니,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리라. 블라디미르, 수즈달, 노브고로드 등 옛 도시들을 가 보아도 발길 닿는 곳곳이 교회 아니면 수도원이다.
그만큼 정교회는 러시아인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정교회는 정권과 갈등을 빚었으며, 스탈린 시대에는 수많은 교회ㆍ수도원이 파괴되고 능욕당해 때로는 수영장이나 화장실로 쓰이기도 했다. 그 뿐이랴.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의 상징처럼 되었던곳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전통의 회복에서 자국의 미래를찾으려는 염원으로 이를 적극 복원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인 모스크바 크레믈맞은 편 카잔 사원 앞에서는 우리 일행을 보고 열 살 남짓한 아이들 셋이 들꽃다발을 내밀며 “하나 사세요” 애교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정교회에 들러 예배 장면을 지켜보다 보면, 그 옛날 키예프 시절 종교를 탐색하던 블라디미르 공의 사절들이콘스탄티노플에서 예배에 참례한 후 그 의식의 천상적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공에게 정교의 수용을 건의했다고 하는 연대기 기록이 그럴 법하게 여겨진다.
그들은 논리의 정밀성을 따지는 데 익숙하다기보다 형상의아름다움에 더 빨리 매혹되는 영혼들이었으리라.자기네 후예들이 그러한 것과 꼭마찬가지로.
얼마 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그리스에 들러 십자군 원정 때 로마교회가 그리스정교에 대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과했지만, 러시아 방문은 이 나라 정교회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교황이 자기네 땅에 입맞추는 것을 끝내 용납할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 역사적으로 형성된 종교의 힘은 겉보기보다 강한 것 같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불편한 화장실 유라시아 특징?
중국부터 우즈베키스탄까지 몽골제국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역사에세이팀에게 가장 곤혹스러웠던것은 화장실이었다.
역, 터미널 등의 공공화장실은 물론이거니와그 지역서 가장 좋다는 숙소의 화장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네이멍구(內蒙古)로 가는 도중 들른 도로변 음식점의 화장실.말이 화장실이지 엉덩이만 살짝 가릴 높이의 나무칸막이가 처져 있었고 발 아래로는 변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화장실 밖에서도 그모습은 그대로 보였다.
초원이 많은 몽골에서는 차를 타고 가다가 남자는 도로 오른쪽 풀밭으로, 여자는왼쪽 풀밭으로 들어가 서로 등을 돌린 채 집단으로 볼 일을 보는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화장실 불편이라면 러시아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로 치면 서울역에 해당하는 모스크바레닌그라드역(러시아는 열차도착지명을 따 역 이름을 정한다)의 남자화장실은 어른 허리 높이의 시멘트 칸막이만 처져 있어서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켜세우면 옆 칸에서 누가 일을 보는 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노브고로드 등에서는 그 지역서 가장 좋다는 숙소 객실의 변기 뚜껑을 모두 떼놓아 걸터앉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왜 변기 뚜껑을 떼놓았는지 물어보았지만 그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러시아는 시설만 나쁜 게 아니라 ‘화장실 인심’도사나웠다. 국내선 항공기가 뜨는 모스크바 도모 제노바공항은 남자 화장실 6칸 중 4칸이 잠겨있어 수십명이 줄을 서서기다려야 했다. 튜멘박물관의 화장실도 이유없이 문을 닫아 놓았다.
터키만은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는 전통 탓인지 화장실도 깨끗하고개방이 잘돼 있었다.
지금 우리는 내년 월드컵을 앞두고 화장실 가꾸기가 한창이다. 문제의 나라들과비교하면 더 할 수 없이 훌륭하지만 시골 구석구석의 화장실이 인상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길 바란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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