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일 근무제는 웬만한 외국계 기업이나 ‘선진적’인 일부 국내 기업들이 이미 도입해 운용하고 있는 제도.그래서 느낌으로야 그다지 낯설지도 않다.하지만 오랫동안 세계 최장수준의 노동시간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온 우리나라 대부분의 근로자들에게 매주 이틀의 휴식은 여전히 ‘팔자가 다른’ 이들의 꿈 같은 얘기.
이제 그 꿈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보면서 많은 근로자들은 그 ‘황감한’ 논의에 한껏 가슴이 설레면서도,한편으로는 ‘정말 그렇게 놀아도 되는 것일까’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일을 안하면 왠지 불안한 육체적·정신적 ‘관성(慣性)에다, 편안한 근무여건을 따지기 이전에 당장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직장이나 일감부터가 절박한 경제난 시대를 살고있기 때문.
무성한 경제사회적 논의에도 불구, 어떻든 내년 이맘때부터는 주5일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남보다 앞서 주 이틀 휴일의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가늠해 본다.
# 토요 조조(早朝)영화, 그리고 한낮의 드라이브
㈜모토롤라코리아 기획조정실 이수형(李秀亨) 차장은 토요일이면 한껏 게으름을 피운다.지난 주에도 평일보다 2시간 늦은 아침 9시에 일어나 아내와 느긋한 아침식사를 끝냈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이미 학교에 가고 없다.
아내의 제안에 오전 11시부터 시작되는 토요 조조영화를 보려 서울 양천구 목동 집에서차로 20분 거리인 신촌의 극장을 찾았다.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원래 SF 쪽은 별로지만 주말마다 워낙 자주 영화를 보는 탓에이젠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저 새 영화면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인근 백화점에 들러 일주일치 생필품을 사던 차에 아들에게서 휴대폰 전화가 왔다.친구집에서 노느라 늦게 집에 온다는 전갈. 아들과의 점심 계획이 무산된 만큼 새로 계획을 짜야 한다.
“양수리, 오케이?” 아내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차 핸들을 틀었다. 가벼운 외식에다카페에서 차까지 마시고는 한가로이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벌써 저녁무렵.
서둘러 집에 와서는 아들과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며 놀아주다 다시아내와 맥주 한잔을 걸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북한산에 올라야 하기 때문. “지금 회사를 계속 다니건 옮기건, 어쨌든 토요근무를하는 곳은 절대 가지 말라는 것이 아내의 ‘엄명’입니다.”
모토롤라코리아는 1992년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 차장은 국내 굴지의자동차 회사에서 11년간 근무하다 4년 전 이리로 옮겨왔다.
토요 야간근무, 경우에 따라선 일요 근무까지 당연시하는 조직 분위기에 익숙했던 그는주5일 근무 조건에도 ‘우리나라에서야 일 있으면 주말에도 출근하는 거지, 별 수 있나’고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러나 ‘천지개벽’이 없는 한 주말근무 없는 회사생활 4년은 그와 가족의 삶, 심지어 인생관까지 완전히 바꿔 버렸다.
# 주말, 휴식만은 아니다
이틀을 쉰다는 것은 단순히 휴일이 하루 늘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도무지쉬는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우리 근로자들에게 이틀은 그냥 놀고 보내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기 때문.
올해 4월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는 ㈜삼성테스코의 고영실(高英實ㆍ28·여) 주임은 “예전에는 다음주를 대비한 휴식 이상을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회사생활과 구분된 자신만의 계획을 구상하고 실천할 여유가 생겼다”고 만족해 했다.
고 주임은주5일 근무제로 바뀌자 마자 종로에 있는 주말 영어회화반에 등록, 토ㆍ일요일 각각 3시간을 꼬박 공부에 투자하고 있다.
때문에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시간은 오히려 예전보다 줄어드는 예기치 못한 결과가 발생했다.
사내 레저동호회 ‘케세라’를 이끌고 있는 태경실(太璟實ㆍ38·여) 과장은 “래프팅,번지점프, 윈드서핑 등 장거리 이동을 해야 가능한 취미생활을 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며 “최근 동호회 합류를 문의해 오는 동료들이 부쩍 늘었다”고소개했다.
삼성테스코가 최근 직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혼자의 경우 76%가 토요일을 가족을 위해 보낸다고 응답한 반면, 미혼자는41%가 문화생활, 33%가 자기개발에 활용한다고 응답했다.
주말을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으로 계획하려는 분위기 탓에 직장 회식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99년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LG칼텍스 가스의 김창수(金昌秀ㆍ47) 과장은 “과거에는 금요일이면 동료들간의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지만 요즘은찾아보기 힘들다”며 “다들 주말에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 그러나 대가는 따른다
모토롤라코리아의 김경덕(金京德) 과장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 퇴근까지 점심시간 한시간을 빼면 그야말로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일을해야 한다”고 전한다.
커피 마시고, 신문 뒤적이고, 동료들과 농담하는 등 ‘워밍업’을 거친 후에야 일이 손에 잡히는 ‘한국적’ 업무풍토는 사라진지 오래다.
당연히 점심시간을 늘여 쓴다거나 숙취해소를 위해 근무시간 중 사우나를 가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
“출근하자마자 그날 처리해야 할 업무파악부터 합니다. 어느 땐 점심 먹을 시간조차 부족할 만큼 타이트하죠.”
직원들 간의 대화가 잡담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위해 업무시간 중에는 바로 옆자리에 앉은 팀원들간의의사소통도 사내 메일을 통해 해결할 정도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잔무 정리로 신경이 팽팽히 곤두서는 것도 주5일 근무제하에서의 ‘신종증후군’. ‘깔끔한’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대가다.
문화관광부에 근무하는 김모 서기관은 “주5일 근무제 시행에 대한 공무원의 기대감이 무척 높긴 하지만 현재와 같은 느슨한 근무풍토가 그대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업무의 계량화와 집중화, 이를 통한 효율성 제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부적응자도 있다
약도 체질에 따라 받는 경우가 있고 거꾸로 역효과가 나기도 하듯, 주5일 근무제도 모든 이에게 만족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통적 근무시스템에 인이 박힌 중견 직장인의 경우는 다소의 부적응 증세가 드러나기 마련.
삼성테스코의 김모 과장은 “이틀이나 집에서 뒹굴려니 집사람, 아이들 눈치가 보인다”고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이유인 즉슨, 일요일 하루만 쉴 때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당당하게’ 휴일 내내 낮잠을 잘 수 있었지만 요즘은 용납이 안된다는 것.
“아이들 등살에 피곤해 죽겠어요. 놀러가는 것도 한 두번이지 어른이야 뭐 재미가 있나요. 그렇다고 뭐 특별한 취미생활이 있는 것도아니고….
아내는 집에 있으면서 먹는 것만 찾는다고 구박입니다.” 김 과장은 출근을 핑계로 토요일 오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한잔을 기울이던‘반공일’의 여유가 몹시 그립다고 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유모 씨의 경우는 주말을 모조리 자신의 취미생활에만 투자해 가족들의 원성을 듣는 케이스.
토요일은 거래회사 관계자들과 골프약속, 일요일엔 대학 동창들과의 등산계획으로 그의 주말 일정은 언제나 빡빡하다.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젠 살가운 느낌도 어느 정도 사라진 아내의 얼굴을 이틀동안 온종일 마주해야 하는 것은 사실 좀 고역”이라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아내가 본 주 5일 근무 남편
“만점 남편이 됐어요.”
결혼 생활 3년째인 주부 김원남(金垣男ㆍ27)씨가 남편 김병조(金柄助ㆍ31)씨의 달라진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남편이 토요일에 쉬게 되면서 문화 생활에 같이 참여하고 친지 대소사를 챙기는 등 가정 생활에 충실해졌다”며 주5일근무 예찬론을 폈다.
남편이 다니는 한글과 컴퓨터사는 올들어 주5일 근무제를 전격 도입했다. 맞벌이는 하는부인 김씨는 토요 격주 휴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평가원에 다닌다.
교회 성가대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음악에 대한 공통 관심사를 가진 서로에게 끌려 부부의연을 맺었다.
그렇지만 들떴던 기대와는 달리 이들 부부에게 문화 생활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업무상 거래처와 회식이 잦은 남편 김씨가 취한 모습으로 퇴근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
하지만 올해부터는 아내가 직장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면 부부는 미리 예약해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거나 음악회에 들르는등 결혼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화 생활을 즐기게 됐다.
“토요 휴무 전 그이는 주말이면 ‘피곤하다’며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날이 캐반이었지요.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먼저 신문에 난 영화, 음악회 기사를 스크랩했다가 보여주곤 합니다. 삶의 여유를 찾은 것 같아요.”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졌던 가족, 친지들도 다시 주변으로 돌아왔다. 매달 반드시한번씩은 양가의 부모님들을 찾아뵙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부터 ‘일등 사위, 일등 며느리’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남편 김씨는 “연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아내와 대화를 자주 하면서 신혼시절의 잔 재미를 다시 찾은 기분”이라며 “생활에 활력이 더해지면서 일에 대한 의욕도 확실히 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토요일에는출근해 봐야 거래처와 연락도 잘 되지 않고 집중력도 떨어져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주 5일 근무제 실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평소의 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되더라”고 덧붙였다.
이들 부부는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연휴기간에 마땅히 즐길만한 일들이 의외로 많지 않은게 사실“이라며 “이제 토요 휴무가 전반적으로 도입되면 연휴 샐러리맨들이 즐길만한 문화산업 쪽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발돼야 할 것”이라고 입을모았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 도입시기·휴일수싸고 재계-노동계 막바지 진통
주 5일 근무제와 관련, 정부는 연내 입법을 통해 내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한다는방침을 굳혔지만 당사자인 재계와 노동계가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 막바지 진통을 겪고 있다.
최대 쟁점은 이 제도의 도입 시기. 경제5단체는 경제전반에 미칠 충격을 감안,2003년 이후로 시행을 늦추고 경영여건이 열악한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보다 충분한 유예기간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대통령공약 사항임을 내세워 내년 1월로 전면 실시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휴일수에 대해서도 재계는 이대로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될 경우 노사합의에 의한약정휴가를 합쳐 연간 155~175일이 휴일이 된다며 법정 공휴일 축소와 함께 연월차 휴가를 20일 이내로 줄여야 한다는 의견인 반면 노동계는연월차 휴가 22일 보장 뒤 1년 근속시 1일을 추가하는 방안을 내놓고 맞서고 있다.
이밖에 양측은 생리휴가 무급화 여부, 초과 근로시간 상한선 및 초과 근로수당할증률 조정 문제 등을 놓고서도 평행선을 긋고 있어 결국 노사합의는 무산되고 정부 원안대로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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