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세 개의 국가, 즉 바이마르 공화국, 히틀러 제3제국, 그리고 동독의 멸망을 지켜본 것은 작가로서의 내겐 하나의 특권이다.동독은 강제로국민을 한 세대 이상 기차역 대합실에 억류시켜 놓았었다. 수많은 기차들은 대합실 모니터 속에서만 통과했고 아무도 그 기차엔 탑승할 수 없었다.동독은 그렇게 국민을 상대로 통치가 아니라 범행을 해 온 것이다.”
하이너 뮐러가 조국 동독의 멸망 때 던진 탄식이다. 뮐러는 구 동독 작가로서의자신의 삶을 스페인 화가 고야에 비유했었다.
고야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대한 동경과 나폴레옹 정복군의 테러라는 극렬한 모순 사이에서 그림을 그렸음을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절절 끓는 혁명의 이상이 공산독재라는 테러로 바뀌는 그 끔찍한 혁명의 배반에 대한 고발과 ‘혁명공장’으로 변해버린 조국 동독에 대한 공격, 그것이 평생 뮐러 문학 속을 회오리치던 분노의 호르몬이었다.
통일 후 그는 독일 통일이 독일 역사 속의 또 다른 권력의 재개편에 불과하다는부정적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더구나 독일 통일은 그에겐 그의 정보국 비밀요원 경력 폭로로 시작됐다. 구 동독 작가 디터 슐츠는 뮐러가 정보국비밀요원으로서 정기적으로 정보국과 접촉해 왔다고 폭로한 것이다.
뮐러의 초기 암호명은 ‘시멘트’로추정되었다. 시멘트는 뮐러가 1972년에 발표해 이듬해 베를린 앙상블에서 초연한 희곡의 이름이다.
이 일로 발화한뮐러의 정보국 비공식요원 경력 논쟁의 불길은 거셌다. 뮐러의 반격은 침착했다. 그는 구 동독 시절 ‘정보국 비공식요원’이라는 용어조차 없었음을 상기시켰다.
이 표현은 결국 통일 후 전 서독권에서 만들어낸 새 용어라는 것이다. 그는 “구동독을 악마화시키고 비밀정보국을 악령화시키는 것이 서독 반공주의자들의 기쁨이 되었다”고 반격했다.
통일 직후인 1990년 초 그가 자서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래서 주목된다.그의 자서전 집필을 도운 여류작가 카챠 랑에 뮐러는 이렇게 회상한다.
“난 그때 창작지원금을 받아뉴욕에 체류한지 겨우 삼 개월 정도 되었는데 하이너에게서 연락이 왔죠. 자서전 작업을 도와달라는 겁니다.
그때 내가제시한 조건은 단 한 가지였죠.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돕겠다는 것이었어요. 그가 약속했죠.
그는 자서전을 직접 쓸 생각은 없었어요.그해 카나리아 섬은 굉장히 더웠죠. 그는 더위를 증오했어요.
우리는 내내 실내에서 일했죠. 항상 오전 열 시에 시작해서 오후 네 시면 중단했지요.” 그녀는 뮐러의 동생 볼프강의 아내였다.
볼프강은 그보다 열한 살 아래였다. 그녀와 볼프강과의 결혼생활은 아주 짧았다. 그녀는1984년 서독으로 망명한 뒤 소설가로 데뷔, 바하만 문학상등을 수상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여름 카나리아 섬엔 유난히 고양이가 많았다. 뮐러는 절대 빵과 생선을먹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한다. 기름에 절인 정어리만은 예외였다.
뮐러는 그때 이미 심하게 땀을 흘렸고, 삼키는데 장애가 있었고, 격한 속쓰림에다지속적으로 토했다.
그가 위스키를 너무 많이 마시고 줄담배를 피워대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미국에 있을 때도 뮐러는 전화로 속쓰림에 사용하는 “미국제 말록산 한 병만 들고 와”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뮐러는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젊은 시절부터 염증이 그의 식도를 점령했고 그 식도의 통증이 그의 특징이 된 지독히 낮은 목소리를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서서히 죽음의병 후두암에 이른 것이라고 그녀는 진단한다.
그는 또 대범하고 손이 큰 남자였다. 가난하던 시절 그는 남에게 돈을 빌리면 갚는 일이 없었고, 유족해진후엔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단 한번도 재촉하는 일이 없었다.
자서전 작업엔 거의 일년반의 시간이 소요됐다. 네 권 분량의 초고를 대폭줄이고 구어체를 문어체로 바꾸고 그의 희곡 ‘햄릿 기계’ ‘임무’ ‘맥베스’ 등의 자료들을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뮐러 자신의 대대적수정작업이 있기까지 적어도 열 개의 작업과정을 거치는 맹렬한 공동작업이었다.
1992년여름 그의 이 자서전 ‘전투 없는 전쟁 - 두 독재자 사이의 삶’이출간되자 통일독일
내에선 “거침없는진실”이라는찬사와 “참을 수 없는 잡담”이라는 비난이 치열하게 엇갈리며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하이너생애엔 중요한 두 여자, 잉에와 깅카가 있었죠. 두번째 아내 잉에는 손풍금과 만돌린을 잘 치는 여자였죠.
외로우면 그녀는 욕실의 문을 잠가놓고 혼자 만돌린을 쳤고 시를 썼고 하이너와 싸운 후엔 우울증에 빠졌고 그리고자살했죠. 세번째 아내인 불가리아 출신의 깅카는 불가리아 정보국에 끌려가 소피아 감옥에수감된 적이 있었죠.
필경 뮐러를 정보국에 협조시키기 위해 당시 동독 정부와 불가리아가 협조해만든 위협극이었음이 분명해요.”
삼 년 뒤 뮐러가 후두암 수술 후 뮌헨병원에 입원 중일 때도 그녀는 마침다른 창작기금을 받아 뮌헨의 한 저택에 체류 중이었다.
그녀는 늘 뮐러가 좋아하는 청어 샐러드를 들고 그를 방문했었다. 운명하던 그 겨울, 병상의뮐러는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세 살 난 어린딸 안나를 위한 성탄절 선물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안나는 그의 마지막 아내인 사진작가브리키테 마이어와의 사이에서 얻은 그의 성격과 외모를 빼어닮은 딸이었다.
이 어린 딸은 그 겨울 ‘배 한 척’을갖고 싶어했다. 욕조에 띄우고 앉아 놀 수 있는 배 한 척을. 결국 그녀는 사흘간 온 뮌헨 시내를 다 뒤졌다.
고무배든,공기를 넣어만든 보트든 구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배는 여름상품이어서 도무지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백화점에서 어린이용 타자기 한 대를샀다. 어린 안나가 아버지의 컴퓨터를 만지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서 타자기를 내밀며 그녀는 왜 배 한척을 구할 수 없었는지 설명했다. 아름다운타자기군. 뮐러가 말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얼마야? 그는 그녀에게 돈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겐 충격이었다. 평생 그렇게 조건없이 주고받는것은 그들 사이엔 아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녀는 그의 죽음을 예감했다. 결국 그 타자기가 그가 어린 딸과 나눈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나흘 후 뮐러는 운명했다.
“우리는 그의 67회 생일날 그를 매장했죠. 영하 20도가 넘는 혹독한 날씨였죠. 우리는 장갑을 낀 채 도로틴슈타트 묘지 싸늘한 흙 위에누운 그에게 꽃을 바쳤어요.
매장 예식 때 평생 그의 작품에 비난과 검열 채찍을 휘두르던 그의 적들도 와서 꽃을 바쳤죠. 난 더 이상 하이너를위해 청어 샐러드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오래 울었어요.”
독일 통일 직전 뮐러는 한 친구의 스케치에 헌정한 시 ‘하이에나’에서통일 후 도래할 자본주의에 대한 예언적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하이에나는 점령군이 죽어버려사막에 내던져진 탱크를 사랑한다. 그는 천 한 번의 모래바람이 그 철판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시간이 온다. 하이에나의 문장(紋章)은 수학(數學)이다. 그는 결코 한 점의 찌꺼기도 남기지 말아야 함을 안다. 하이에나의 신(神)은 영(零)이다.”
/재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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