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60)씨를 중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원로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중진이라는 말은 그의 시력이나 문단 내 위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 듯해 죄송스럽고, 원로라는 말은 시인을 노인 취급하는 듯해 죄송스럽다.아무튼 시인 오규원씨가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 시 네 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한 편이 ‘아이와 망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심상한 풍경을 심상찮은 방식으로 묘사하며 삶과 세상의 어떤비의를 캐낸다.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돌이 사라진 자리가 젖었다고 할 때 그것은 들린 돌이옴폭 남긴 공간이 물리적으로 젖어있다는 뜻이겠지만, 그것은 또 정든 돌을 떠나보내는 공동(空洞)의 눈물을 연상하게도 한다.
돌 없이 어두워졌다는 행은 옴폭 패인 구멍의 어둠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돌이 없어졌는데도, 이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거기 무심한 채 오롯이 돌아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 때마다 날개를/ 몸 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직 운동을 되풀이하는 돌멩이에서 숨겨진 날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 문단 어른의 젊은 감각이 싱그럽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그 지움 때문에 허공은 옛 허공과 똑같아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 전후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그 허공은 어떤돌멩이가 지나간 허공이고, 그 사실을 지웠다고 하더라도, 지웠다는 사실 자체는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아이가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장난을 하다 길가에 그것을 버린 것은 무심코 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굳이 혼돈 이론의 나비 효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주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도하다.
아이는 자신의 무심한 행동으로 젖은 자리를 만들어내고, 존재와 부재를 교환하고, 허공과 돌을 조우하게 했다. 그것은 인과의 사슬로 우주에 찬란한 변화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 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에서 시인은 돋아난 발을 본다.
그 돌이 멈추어 설 때, 시인은 (돌의) 몸 속으로 들어간 발을 본다. 오규원씨의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은 노래꾼이 아니라 견자(見者)라는생각을 하게 된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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