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속으로] 슈바이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속으로] 슈바이처

입력
2001.09.04 00:00
0 0

1965년 9월4일 프랑스의 의사 알베르 슈바이처가 90세로 타계했다.슈바이처는 알자스의 카이저스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로 넘어가 슈바이처도 독일인에서 프랑스인이 됐다.

프랑스의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슈바이처의 종질(從姪)이다.

슈바이처는 칸트 연구자이자 신학자이자 바흐 연구자이자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의사로서 아프리카에서 펼친 인도주의적 의료 활동 때문이다.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지금의 가봉 공화국)를 중심으로 펼쳐진 그의 의료 활동은 30대에 시작돼 노년에까지 이어졌다.

유럽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당시로서는 오지였던 적도 아프리카로 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미 생전에 자신의 봉사 활동을 명예로 보상받았다. 40대 이후 그는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며 괴테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고, 마침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인도주의에는 유색인에 대한 백인의 ‘시혜’라는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이 ‘인도(人道)의 전사’가 자신이 돌보는 흑인들을 자신과 대등한 친구로 대했다기 보다는 동정을 베풀어야 할 하급 인류로 여겼다는 것은 그의 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슈바이처의 인도주의적 열정에는 식민주의 자체가 절대악이라는 정치 의식이 크게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슈바이처는 항일 투쟁중인 중국 공산당원들의 친구로서 그들을 치료했던 캐나다 의사 노먼 베순과도 꽤 달랐고, 스스로가 제3세계 출신의 의사로서 제3세계 민중의 해방을위해 아예 청진기를 내던지고 총을 들었던 체 게바라나 프란츠 파농과는 크게 달랐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