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9월3일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호치민이 79세로 타계했다. 그는 1946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호치민의 삶은 20세기의 격동 속에서 혁명가란, 사회주의자란, 애국자란 어때야 했는지를 전범으로 보여준다.
그의 조국은 아직도 가난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베트남의 독립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고, 베트남이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 민족적 자존을 지켜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지금도 그를 ‘호 아저씨’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호치민은 성년이 된 뒤 일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았지만, 그의 공산주의는 20세기 베트남의 가장 큰 대의였던 민족해방운동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식민지 청년 호치민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주국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그는 21살 때인 1911년에 견습 요리사로서 그 나라 땅을 처음 밟았다.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 당원이었던 호치민은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해 베트남 안팎에서 식민지 해방운동을 지도하다가 1941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베트민(월맹ㆍ베트남 독립 동맹회)을 결성했다.
1945년 8월 외세에 기생하는 구엔(阮)왕조를 무너뜨리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8월혁명의 주축이 이 베트민이었다.
호치민은 공식적으로는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지도자였지만, 그의 이름은 외세에 맞서 싸우는 남북 베트남 민중 전체의 단합을 상징했다.
남베트남의 가장 완고한 반공주의자도 호치민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못했다.
남북을 통틀어 그런 지도자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러워할 만한 점이다. 정약용을 깊이 흠모해그의 기일을 손수 챙기기도 한 호치민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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