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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적당주의에 꺾인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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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적당주의에 꺾인 날개

입력
2001.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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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미국에 갔을 때 마침 친한 미국친구가 가족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떠나며 자기 집을 내주는 덕에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오히려 집을 봐줘 고맙다며 그 친구는 내게 전기세도 한 푼 내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냉장고 안에 있는 온갖 먹거리는 물론 지하실에 모셔둔 포도주까지 내주면서 말이다.어떻게든 최소한의 염치라도 차려야겠기에 그들이 돌아올 때 공항에 마중을 나가겠노라 자청했다. 친구는 도착시간이 자정을 넘길 것이라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내가 특유의 최씨 고집으로 밀어붙여 그리 하기로 했다. 그들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날 한 밤중에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고속도로를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늦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대합실로 들어서려는데 비행기가 연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괜히 마중을 하겠다 그랬나 후회하며 나는 자정이 훨씬 지난 그 을씨년스런 공항대합실에서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졸다 깨다 했다.

지금 미국의 항공산업은 그야말로 혼란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있다. 한 두 시간 연착은 예사이고 결항도 밥먹듯 한다. 불황을 타개하려 무리한 경쟁을 벌이는 통에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가격들이 속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스턴에서 시카고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것이 시카고에서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힐수가 있다.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각종 규제들과 공항들간의 과열경쟁 때문에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일들이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염치도 없이 우리더러 항공후진국이라며 흉을볼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부아가 치민다. 미국 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 항공사들을 이용해야 했지만 내 눈에는 우리 비행기들만큼 깨끗하지도않고 우리 승무원들처럼 친절하지도 않아 보였다. 우리 옛말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영락없는 그 꼴이 아닌가.

우리 항공사들이 미국연방항공청(FAA)으로부터 2등급 판정을 받기가 무섭게 우리나라로 출항하는 미국 항공사들이 일제히 가격을 낮춰가며 호객 경쟁에 돌입했다. 물론 미국이 우리에게 큰 시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제기구도 아닌 한 나라의 정부조직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그런 판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뭔가 석연치 않다 싶더니 금세 그 나라 회사들이 틈새를비집고 들어오는 걸 보자 입맛이 씁쓸하다. 항공안전등급 재조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 대표들의 얼굴에서 어딘가 모르게 겸연쩍음을 읽었다면 나의 지나친 상상일까.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미는 까닭이 또 있다. 우리 정가의 최대 다수당도하지 못했던 일을 미국의 일개 청이 간단히 해치웠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감기에 걸리면 우리는 기침을 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미국의 숫자놀음에 우리 장관의 목이 달아나다니. 물론 다른 실책으로 이미 몇 차례 탄핵을 당한 장관이긴 했지만 미국이 날자 배꽃 떨어지듯 그렇게 쉽게 떨어질 줄이야.

정식으로 항의도 해보고 억울함을 호소해보고 싶어도 규정을 어긴 명백한 사실을 어찌하랴. “법은 좀 어겼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랬으니 선처 바란다”는 식의 정실주의는 다른 선진법치국가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규정은 어겼지만”이란 말만 나오면 거기서 논의는 끝이 난다.

국제사회에서는 떳떳해야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다. 규정을 어기면 똥 묻은 개들이 짖어대도 할 말이 없다. 일본 정부가 왜곡교과서 항의에 대해 그만큼 덤덤할 수 있는 것도 최소한 그들의 법규상 잘못한 것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번 일에 우리가 부당하게 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들이 줄기차게 반복하여 범하는 적당주의의 어리석음이 너무도 한심하여 한탄을 해볼 뿐이다. 비록 서비스는 엉망일망정 미국항공사들은 규정을 어기지는 않았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보다 천성적으로 더 정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워낙 법이 엄격하게 집행되니까 그 사회가 그만큼 투명해진것뿐이다.

미국인들도 법 밖에서는 철저하게 야비해질 줄 알지만 법안에서는 양처럼 순하다. 법을 어기면 가차없이 가혹한 벌이 내려진다는 걸 잘 알기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좀스러워서 깨알 같은 규정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억울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인상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법을 위반하여 단속되면 일단 재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곤 곧바로 ‘아는 사람’에게 전화하기 바쁘다. 국제사회에서는 전화를 걸만한 사람이 딱히 없다는데 우리의 슬픔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 중 버릴 수만 있다면 제일 먼저 그러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바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다. 적당주의는 안으로는 우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밖으로는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이젠 우리도 정도를 걸어 서울에 가야 한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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