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P공조는 1997년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은5년 간 실정한 신한국당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연대한다”면서 대선후보 단일화를 선언하면서 출범했다.대선 승리 후 DJ가 약속대로 98년2월24일 JP를 총리로 지명, DJP공조는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98년 6ㆍ4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공천갈등을 빚은 데 이어 9월 고려대 최장집(崔章集)교수의 내각제 비판 이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JP는 “과거 대통령의 불행한 역사는 과욕 때문”(98년 12월18일)이라며 내각제 화두를 던졌다. 하지만 DJ가 “친구와의 의리를 내가 먼저 어긴 적이 없다”(98년 12월18일)고 다독이자, JP는 “대통령과 나는 척하면 삼십척”(99년1월14일)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99년 6, 7월 잇단 회동에서 DJ가 내각제적 총리역할을 보장하자 JP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며 내각제 개헌유보에 동의했다.
JP는 그러나 “8월이 리미트(시한)”(99년 7월13일)라며다시 맞섰고, 16대 총선 직전 끝내 “야당으로 새로 태어나겠다”(2000년 2월24일)고 결별을 선언했다.
4ㆍ13 총선서 참패한 JP는 DJ가 2000년 4월17일‘국민과 대화’에서 “공조는 불변”이라고 확약하자 이한동(李漢東) 자민련 총재를 총리에 추천, 공조를 복원했다.
JP는 그러나 8ㆍ15 방북단소동과 관련해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자진사퇴를 요구하며 “지난 3년간 공조한다는 차원에서 못 참을 것도 참으며 별일을 다 해왔으나 정비할 때가 왔을때 정비할 것”(8월30일)이라고 말해 공조의 종말을 예고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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