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30ㆍ가명)씨는 7년전 이맘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교통사고로 입원, 혈액검사를 받은 지 3일 후. “각오부터 단단히 하세요. 에이즈(AIDSㆍ후천성면역결핍증) 양성반응이 나왔어요.”
주치의가 창백한 표정으로 던진 말 한마디에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김씨는 “유흥업소 여성과 몇 차례 관계를 가진 것 밖에 없는 데, 그것 때문인가요”라며 울부짖었다.
“죽을 생각도 했어요. 직장도 그만 두었지요. 술로 세월을 보냈고 폐인이 되다시피 했지요.” 그러나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 보건소 직원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겨우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면역기능이 약화돼 몸이정상은 아니지만, 지금은 에이즈 상담자 겸 에이즈 관련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로 변신해 에이즈 퇴치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 김씨는 최근 또 한번 놀랐다. 항체검사에서 적발하지 못한 감염자를 유전자검사를 통해 찾아냈다는 언론보도가 나간 뒤 문의전화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전에 항체검사에서 정상 판정을 받아 안심했는데 다시 유전자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냐는 전화가 태반이었다”며 “이는에이즈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올 상반기만 159명 감염
김씨의 말처럼 우리나라도 이제는에이즈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징표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 공식 확인된 양성반응자는 1,439명. 이중 220명은 에이즈 환자로 전락, 면역기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양성반응자의 증가세가 매우 가파르다는 점이다. 올 상반기에만 159명이 새로 감염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4.5%나 늘었다. 10대 감염자까지 발견되는 등 연령대도 확산되고 있다.
권관우(權寬祐)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사무총장은 “유흥업종사 여성이 100만명을 넘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 발표를 믿기 어렵다”며 “실제감염자가 정부 집계 보다 최고 10배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에이즈 양성반응자가 이미 국내에서 수만명에 이른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감연원인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일반에는 동성애나 주사 등을 통한 감염이 ‘1순위’인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김씨의 경우처럼 이성과의 성접촉에 의한 감염이 가장 많고 급증추세를 보이고 있다. 매매춘 여성과의 섣부른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감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혈이나, 혈우병치료제 등 혈액제제 등을 통해 감염도 증가추세다.
▼예방ㆍ관리는 뒷걸음
이처럼 에이즈가 페스트처럼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지만 에이즈 예방과 관리는 후진성을 면치못하고 있다.
양성반응자로 밝혀지면 관할 보건소를 통해 3개월에 한번씩 성접촉 여부를 확인하고 치료비까지 지원해준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역작용이 더 크다. 권 총장은 “당국이 신원을 파악하고 동태를 추적하기 때문에, 신분 노출을 꺼려 검사를 기피하는 사람이 많다”며“때문에 환자들이 양지로 나오지 못해 감염자 파악과 관리에 어려움이 더 커진다”고 지적했다.
에이즈 예방 홍보도 수준 이하다.정부의 에이즈 관련 홍보예산은 연간 3억원 정도. 주요 신문들에게 홍보광고 한번 내지도 못할 예산이다.
그나마 에이즈를 백안시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내놓고 예방홍보활동을 하기도 어렵다고 복지부 관계자들은 하소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한에이즈예방협회등 민간단체가 강연, 홍보책자 배포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에이즈는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방이 최고”라며 “재앙을 막으려면 국가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에이즈 小事
1981년 5월 미국 LA의한 병원에 전신에 큰 반점이 생기고,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 남성 동성애자 다섯명이 입원했다.
단순 보균자가 아니라, 이미 환자 상태에 접어든 에이즈 감염자들이었다. 의학계에서는 최초의 공식 에이즈 감염자로 이들을 꼽는다.
물론 이들은 얼마 지나지않아 사망했고, 이들을 진료했던 의료진은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질병이 등장한 게 아니냐는 공포심속에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에이즈 바이러스의정체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 의해 83년 밝혀졌다. 파스퇴르연구소는 나아가 85년 감염여부를 판정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항체검사법을최초로 개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 6월 최초의 환자가 보고됐다. 우리나라에 와 있던 외국인이었다. 그 해 12월에는 내국인 환자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해외 근로자로 나가있던 이남자는 현지 검사에서 감염이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고 귀국, 우리나라에서 재검사를 받은 끝에 환자 판정을 받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전세계에서 발생한 감염자는 모두 3,610만명. 이중 2,180만명이 사망했다. 지난 한해에만도 530만명이 새로 감염됐고 300만명이 숨졌다.
지난해까지 발생한 감염자는▦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2,530만명 ▦동남아 500만명 ▦남미 130만명 ▦북ㆍ중미 128만명 ▦동구와 중앙아시아 70만명 ▦ 동아시아 및 호주ㆍ뉴질랜드등 태평양 연안 66만명 ▦서유럽 54만명▦북아프리카와 중동 22만명이었다.
우리가 속해있는 동아시아는 감염자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세계의 감염자가 이보다 3~5배는 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외국의 AIDS 정책
우리나라 에이즈정책이 예방활동보다 감염자 ‘관리’를 중시하고 있지만, 상당수 국가들은 예방활동에 치중할 뿐 표면적으로 감염자에 대해서는 거의 방치하고 있다.
물론 쿠바가 예외적으로 감염자를 격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미국 등은 에이즈를 다른 질병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도덕적 문제와 결부시키지도 않고, 정부가 감염자를 등록하거나 치료비를 대주지도 않는다.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오히려 감염자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여긴다.
그렇다고 이들 나라가 에이즈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에이즈 환자 관리에서 한발 앞선 일본이 대표적인 예.
에이즈 감염자가 5,000명이 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 격인 후생성에 에이즈를 다루는 별도의 과(課)가 설치, 예방과 연구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우리는 국립보건원 방역과의 사무관 한 명이 에이즈정책을 전담한다.
예산에서도 차이가 크다. 일본의 지난해 에이즈 관련 예산은 127억엔(약1,300억원). 우리는15억원에 불과했다. 민간단체에 대한 지원비를 합쳐도 24억원에 그쳤다.
사회적 인식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 김영수씨는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병실이 비어 있으면서도 ‘입원실이 없다’며 받아주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병원이 이 정도니 일반인들의 생각이 어쩔 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인기 연예인들이 출연을 꺼리는 바람에 에이즈 퇴치공익 광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 등은 사뭇 다르다.농구스타 매직 존슨이 감염사실을 떳떳이 공개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돈나 등 유명 연예인이 에이즈퇴치 공익광고에 스스럼없이 등장한다.
김씨는“1999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제13차 에이즈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에이즈를 조심하자는버스광고와 건물 입간판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며 에이즈를 일반 질병으로 여기고 그 인식을 갖고 예방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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