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8월31일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그보다 46년 전 같은 도시에서 태어났다.보들레르의 삶을 채우고 있는 삽화들은 그의 산문시집 제목이기도 한 ‘파리의우울’로 요약될만 하다. 서른 네살의 나이 차가 나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보들레르는 6살때 아버지를잃고 의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의부가 남겨준 재산을 호화판 탐미 생활로 2년만에 날려서 한정치산자가 됐고, 첫 시집 ‘악의꽃’이 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출간 한 달도 되기 전에 압류되고 벌금형과 6개 시편의 삭제 판결을받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의 만년은 오래도록 동거해온 잔 뒤발과의 결별, 어머니와의 지속적인 불화, 최악의 금전적 궁핍 그리고 마침내는 실어증으로 채워졌다. 그 만년은 보들레르가 한 평생 사숙하던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을씨년스러운 만년을 닮았다.
포가 그랬듯 보들레르도 생전에 꽤 이름을 얻었지만, 역시 포가 그랬듯 보들레르도 사후에야 비로소 문학사의 거인이 되었다. 오늘날, 보들레르가 빠진 프랑스 문학은 상상할 수 없다.
평론가 마르셀 레몽은 프랑스 현대시사를 다룬 자신의 저서를 보들레르에서 시작하고 있고, 발레리는 “보들레르보다 더 중요한 시인은 없다”고 까지 말했다. 셰익스피어나 괴테나 이백은 보들레르보다 더 위대하고 더 재능있는 시인이었을지 모르나, 보들레르만큼 중요한 시인은 아닐지 모른다.
셰익스피어나 괴테나 이백은 그 자신들만으로 위대한 시인이지만, 보들레르에게는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발레리 등으로 이어지는 한 세대 이상의 문학적 생기가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방탕과 정신질환을 시인의 상표처럼 만들어버린 시인이지만, 상상력만이 아니라 논리와 분석을 섬긴 미술평론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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