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가 31일로 취임 3주년을 맞는다. 1998년 8월31일 경선을 통해 한나라당 수장에 복귀한 이 총재는 전당대회 당일 세풍(稅風)의 거센 회오리에 휘말린다.이후에도 이 총재는 1년 가까운 기간,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銃風) 등 간단 없는 시련의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이 총재는 1999년 8월, 취임 1년을 앞두고 3김 청산 특위와 뉴 밀레니엄 위원회를 전면에 내세우며 제2 창당의 기치를 건다.
이 즈음은 세풍 사건의 주역이었던 서상목(徐相穆)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부결되고,이 총재 자신도 서울 송파 갑 재선거로 원내 재진입에 성공하는 등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다.
크게 나누어 첫 1년의 유리(遊離)기와 뒤이은 1년의 착근기를 거친이 총재는 2000년 4월 16대 총선 승리로 당을 완전 장악함은 물론 유일 야당 오너로서 흔들림 없는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총재는 ‘가장 강력한 차기 대선후보’로서 정치적 위상을 공고히 하며 악의와 경계가 착잡하게 버무려진 ‘7년 대통령’이란 구설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럼에도 이 총재는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있다. 무엇보다 이 총재는 미래에 대한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정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했던 뉴 밀레니엄위원회는 일찌감치 실패로 마감됐고, 이 총재가 특히 공을 들이고 있는 국가혁신위는 지향점 자체가 모호하다.
3김 극복도 구호에만 그쳤다. 3김 청산 특위까지 구성하며 과거단절을 꾀했지만, YS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 하는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대책 없는 강경론과 급작스런 유(U)턴은 ‘이회창식 투쟁’의 기본 골격이 되다시피 했다. 측근들은 번번이 ‘굳은 의지‘와 대승적결단’ 사이를 오락가락했지만, 의사결정 과정의 경직성과 전횡성을 다 가리진 못 했다.
개혁공천이라고 자찬한 16대 총선 물갈이 시도는 인적쇄신결과가 신통치 않았을 뿐더러 정치보복과 몰(沒) 신의의 짙은 음영을 이 총재에게 드리웠다.
보수편향의 이념적 경화 역시 스스로 덜어내야 할 정치적 짐이다.
홍희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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