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막사발 천 년의 비밀우리가 막사발이라 부르는 평범한 그릇을 일본은 ‘이도차완’(井戶茶碗)이라 부르며 보물로 대접한다.
마구 만들고 마구 굴리는, 새 것일 땐 밥그릇으로 쓰다가 헐면 개밥그릇도 되었다가 깨지면 사금파리 조각으로 아무데나 뒹굴면 그만인 것을 일본인들은 경배와 찬탄의 눈길로 바라본다.
조선 막사발에 반한 일본 무사들은 400년 전임진왜란 때 막사발을 대량으로 가져갔고 그릇 만드는 장인들도 왕창 끌고 갔다. 왜일까. 무엇이 막사발의 운명을 그렇게 바꿔놓았을까.
대하소설 ‘백정’, 장시 ‘순례자’ 등으로 알려진 작가 정동주는 그게 궁금해서 막사발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조선의 막사발 찻잔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를 교토의 사찰 다이도쿠샤(大德寺)에서1994년 여름 한국인으로는 처음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 절의 주지와 일본의 도자 전문가에게 이 그릇에 대해 묻는 것으로 취재를 시작했다.그게 왜 거기 있게 됐는가, 누가 어디서 왜 만들었으며, 본래 용도가 무엇이며, 일본 차인(茶人)들은 왜 이 그릇 보기를 평생 소원으로 삼는지말이다.
지은이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막사발은 막사발이 아니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쓰던 생활잡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절간 승려가 석가모니의 법열을 꿈꾸며 수행 삼아 경건한 마음으로 만들었던 불교미술품이라고 추정한다.
그 근거로, 막사발이 발견되는 경남 해안 사천 지방이 남방불교의 도래지이며, 석가모니가 살던 시절 승려들이 식기로 쓰던 흙발우의 빛깔이며 모양이 막사발과 닮았다는 것을 든다.
막사발이 누구나 쓰던 흔한 그릇이라면, 왜 경남 해안 일부에서만 발견되고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으며, 또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그릇이라면 왜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막사발이 불교미술품이라는 주장은 흥미롭긴 하지만 막연한 추론일 뿐이다. 막사발전문가인 윤용이 원광대 교수는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결론일뿐 학문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그런 허점을 지은이는 막사발에 바치는 지극한 애정으로 덮고 있다. 다분히 감개무량한말투로 막사발의 미학을 말하다가, 일본인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잡기설’(雜器說)에 이르면 비판의 목청을 한껏 높인다.
막사발은 조선의 가난뱅이 민중이 쓰던 그릇 나부랭이인데, 일본 무사들이 고매한심미안으로 그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미학적 성취를 이룩했다는 것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막사발을 너무나 평범해서 신비로운, 꾸밈없는 자연미의 극치로찬탄했던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이후로 일본에서 정설로 굳어진 잡기설은 지나친 탐미주의적 시각의 소산이며 명품을 몰라본 조선인의 몽매를 경멸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막사발이 제작된 16세기 조선 민중은 유약 바른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는 것은 꿈도 못꿨고,고작 바가지나 질그릇을 썼을 뿐이라며 반박한다.
동시에 “국내 학계가 일본인의 막사발론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일부도예가들은 장삿속으로 일본인 입맛에 맞춰 막사발 재현에 나서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일본에서 보물 대접 받는 막사발이 고향인 한국에서는 푸대접받고 있다”며 한탄한다. 다이도쿠샤의 기자에 몬이도를 보았을 때 느낀 서글픔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조선 막사발이 일본에 ‘끌려와’ 일본의 미학이라는 성채 안에 ‘유폐’ 당해 있다는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다. 차라리 그것을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시원한 절간 마당에 내던져 깨버리고 싶었다.”
그가 막사발에서 확인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조선 도자예술의 우수함이 전부가 아니다.그보다는 거기 얽힌 문화재 수탈의 뼈아픈 역사와 일본에서 수백만 엔을 호가하는 값어치에 눈먼 국내 도굴꾼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읽는다.
이 책은 150점의 컬러사진을 싣고 있다. 일본에 있는 이도차완 명품 40점을 비롯한 조선 막사발, 그것으로 차를 마셨던 일본 무사들의 차 모임을 담은 옛그림, 일본식 차 문화를 보여주는 그 사진들은 아름답지만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우리가 낳았건만, 일본이 길렀구나. 조선 막사발의 운명은 왜 이리 기구한가.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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