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무렵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 줄지어 늘어선 고층건물 외벽에 몇몇 대기업의로고만 빛을 발하고 있을 뿐, 대부분 사무실엔 불이 꺼져있다.‘해가 지지 않는 곳’으로 불리며 새벽까지일에 몰두하는 벤처인의 모습도, 밤새 야식을 실어 나르던 오토바이나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 식당의 모습은 더 이상찾아보기 힘들다.
은행원 강모(34)씨는 “일부 주점 골목을 제외하고는 최근 테헤란로의 밤거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고말했다.
‘벤처 메카’로까지 불렸던 ‘테헤란밸리’가 그저 평범한 ‘사무실 밸리’로 바뀌어가고 있다.전반적인 경기 침체와 자금줄 역할을 하던 코스닥 시장의 부진으로 인해 벤처기업은 대거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기존의 일반 기업들이 메꾸고 있다.
A벤처타워 관계자는 “건물내 300여 벤처 오피스 가운데 지난해 중반부터올 중반 사이 1년 사이에 50% 이상의 입주 업체가 교체됐다”며 “벤처 기업이 빠져나간자리 대부분을 유통, 무역업체 등이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오피스빌딩 정보제공업체 알투코리아에 따르면, 실제로 올 2/4분기 벤처빌딩의 사무실 공실률이 일반 오피스빌딩의 2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돼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 업체 정재연(鄭才娟) 연구원은 “올하반기에는 사무실 신규공급이 늘어 공실률은 더욱 증가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자정 넘어 한 호프집에서 만난 벤처업체 직원 김모(30)씨와 얘기를 나누었다.그는 공대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2년전 벤처 붐이 일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는 온라인 자금조달 시스템을 개발하는 모 닷컴으로 옮겼다고했다.
한 때 나스닥 상장 전망까지 나돌던 이 업체가 시장여건 미비와 수익성 부재로 답보를 면치 못하자 최근에는 다시 벤처창업투자사로 이직했다.
그 닷컴 업체는 올해 테헤란 밸리를 떠났다. “닷컴몰락이 테헤란 밸리 퇴조의 주된 원인이죠. 장기적인 비전보다 주식 상장을 통한 반짝 재미를 노린 기업들이 임대료비싼 이 곳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아직 이 곳에 남아있는 업체들도 인력을 대폭 줄였다. 최근 75명 직원 가운데25명을 감원한 웹 관리업체 A사 관계자는 “경쟁업체가 대폭 늘어난데다 일감마저 지난해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 어쩔 수 없었다”고전했다.
흥청망청 벤처 경기를 함께 누리던 이 일대의 업소들도 철 이른 찬바람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불야성을 이루던 룸살롱,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는 태반이 문을 닫았다.
아직 이 곳에서 룸살롱을 운영하는 주모(45)씨는 “손님들이서로 방 잡기 경쟁을 벌이던 불과 1~2년전 일이 꿈만 같다”며 “매출이절반 이상 줄어 폐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벤처기업협회 오완진(吳完鎭) 홍보팀장은 “인적자원이나 자금조달, 교통여건 등 인프라 측면에서 테헤란 밸리는 여전히 기업을 하기엔 편한 곳”이라면서도 “높은임대료와 물가 등을 감안할 때 획기적인 경기 변화가 일기 전에는 테헤란 벤처밸리의 부활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말했다.
김용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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