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근 전북지사에 대한 한나라당의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정략적으로 이용, ‘흠집내기’나 ‘치고 빠지기’식의 정쟁에 몰두해온 정치권의 관행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지금까지 사실확인 노력 없이 당리에 맞는 주장,근거 없는 문건을 내세운 설(設) 또는 의혹 제기 등에 익숙했던 정치인은 이제 허위의 주장을 할 경우 여론의 지탄 뿐 아니라 법적 책임까지 져야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번 사건의 법적 쟁점중 하나는 한나라당의 행동이 ‘공익’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물론 서울지법 재판부는 안택수 한나라당 의원의 “공공의 목적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였으나 “진실 확인 노력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손해배상의 책임을 물었다.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IMF 외환위기의 상황에서 정부의 고위 관료가 거액의 외화를 집에 쌓아두고 있었다는 진정서를 접한 한나라당이아무런 사실확인 노력 없이 일단 언론에 알리는데 급급했다는 부분이다.
즉, 당시 대여 공세에서 호재를 잡은 한나라당이 여당 흠집내기에 골몰하며 사실확인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면 말고’식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 재판부가 안 위원 개인에 대해 인정한 3,000만원의 손해배상액은 보통 1,000만원 이하 수준에서인정되는 명예훼손 사건의 손해배상금 관행에 비추어보아도 이례적인 거액이다.
재판부는 “정당은 공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에 이들이 허위의 사실을 유포한 데 대해 사인(私人)보다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만일 유 지사가 한나라당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면 일부 승소가 아닌 전부 승소가 났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책임 없는 말을 하면서 정쟁에만 몰두했던 정치인은 그동안 국민에게 피해를 끼친측면이 많았다”며 “이번 판결로 무분별한 주장을 남발했던 정치인에게 상당한 부담이 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정치인끼리의 명예훼손 소송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까지 일단 소송을냈지만 정치상황이 달라지면 소송을 취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모처럼 법원이 보인 ‘정치개혁 의지’도 정치인의 막후 절충에 의해 흐려질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고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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