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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洪蘭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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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洪蘭坡

입력
2001.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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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30일 작곡가 홍난파가 44세로 작고했다.홍난파의 본명은 영후(永厚)다. 독일에 슈베르트가 있고, 미국에 포스터가 있다면 한국에 홍난파가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배우고 부르던 한국 가곡들 가운데 많은 수가 홍난파의 작품이다.

예컨대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이 그렇다. 이 가곡들에는 나라잃은 민족의 설움과 애수가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봉선화’ 같은 노래는 그 자체가 일종의 국가(國歌) 역할까지 맡았다.

홍난파는 가곡만이아니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같은 동요와 ‘백마강의 추억’ 같은 대중가요를 만들기도 했다. 홍난파는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를 지내기도 한 빼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잡지 ‘음악계’를 발간한 음악 저널리스트이기도 했으며, ‘처녀혼’ ‘폭풍우 지난 뒤’등의 소설을 쓴 아마추어 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많은지식인ㆍ예술인들이 그랬듯, 이 다재다능한 음악가도 친일의 덫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40살이던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도해 결성된 조선문예회에가입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38년에는 역시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했고, 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해 친일가요 ‘희망의 아츰’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광수와 함께 만든 이 노래는 조선반도를 “우리 일장기 날린 곳, 이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라고 지칭하며 “천황폐하께 몸과 마음을 바쳐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고 선동하고 있다.

이름있는 사람이 친일의 회유나 강요을 피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것이다. 그러나 홍난파의 친일은 특별히 아쉽다. 그의 이름을 지우고는 20세기 한국 음악사를 온전히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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