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단어의 쓰임에 대해 관심 많은 사람들 하면 영국인들이 먼저 생각난다. ‘어휘의 즐거움’식의 제목이 달린, 어휘 늘리기 책이 잘 팔리는 책 목록에 오르고 BBC방송은 신조어, 어원등의 알아 맞추기 프로그램을 내보내며 다 큰 성인들의 난해어 받아쓰기 대회가 늘 성황인 나라라는 점이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그 영국의 BBC 방송이 다른 한 신문과 단어용법에 민감한 일반인들로부터 얼마전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측의 팔레스타인 살해에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단어 대신 그보다는 완곡한 의미를 가진 ‘살해(killing)’를쓸 것을 내부지침으로 삼음으로써 친 이스라엘편에 섰다는 것이다. ‘살해’보다는‘암살’이란 단어가 더 계획적이고 악의적인 의미가 느껴지니, 터무니 없는 공격은 아닌 듯 싶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따르면 미 언론계는 요즘 ‘테러리스트(terrorist)’ 라는 단어 대신 ‘건맨(gunman)’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분쟁, 마케도니아 사태에 관한 기사를 쓸 때 그렇게 표현한다.
‘테러리스트’는 비 전투대상자에게 정치적인 악의를 가지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엄청난 폭력을 가한다는 의미의 말이지만 ‘건맨’은 명령에 따르는 총기휴대자의 의미인데 전투에 투입된 대부분은 테러리스트는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캐나다 기자들은 퀘벡에 사는 프랑스계 사람들을 부를 때 아주 조심한다. ‘프랑스계캐나다인’과 ‘퀘벡인’ 둘 다를 쓸 수는 있지만 전자는 캐나다를 조국으로 인정하는 사람, 후자는 퀘벡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므로 자칫하면 한쪽을 편드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외국대학의 어문학부에서 개설이 늘고 있는 강좌제목에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있다. 영국의 리버풀대(
www.liv.ac.uk/Harvest/cgi_bin/
),스웨덴의 튤레인대(
www.tulane.edu/~howard/LangIdeo/LangIdeoHome.html
)등의 사이트를 보면 인지언어학전공 학자들이 특히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힘 있는 자들이 단어를 교묘히 선택하고 선택한 단어에 따라 일반인의 생각을 언어 속에 가두는 문제에 관심이 크다.
99년 열렸던 인지언어학자대회(
www.iclc99.su.se/iclc99/
)는 정치가와 미디어가편향적으로 사용해온 단어들에 대해 학자들이 비로소 관심을 갖는다는 반성을 보인 대회였다.
‘언어와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쓴 올리비에르불(Olivier Reboul)은 말한다. “미디어는 말과 단어를 대중들에게 확산한다는 힘을 가졌으므로 단어를 편향적으로 선택해서 써서는 안 된다.”
‘8ㆍ15 통일축전’ 방북단의 일탈행위, 통일원의 준비 안된 자세 등을 놓고 ‘남ㆍ남갈등’이라며 우리나라 전체가 갈등에 휩싸인 듯 포장한 편향된 단어를 반성 없이 쓰는 사회를 보며 언어와 이데올로기 문제가 논의될 날을 가늠해본다.
박금자 편집위원
par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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