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이탄생한 직후인 1240년대, 제국의 수도가 아직 몽골리아 초원 한가운데인 카라코룸에 있을 때 그곳을 방문했던 유럽의 프란체스코파 수도승카르피니(Carpini)는 볼가강을 건너자마자 자신이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전혀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적은 바 있다.물론그가 생소하게 느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드문드문 나타나는 유목민들의 천막과 가축떼를 제외하고는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초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만 그에게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볼가강 동쪽의 유라시아 대륙에서 그는 문화적으로도 이방인이었다.
그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탱그리’라는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유목민이거나, 아니면 ‘알라’를 지고유일신으로 믿는 이슬람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카르피니보다한 세대 뒤 동방을 여행했던 마르코 폴로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방문했던 지역의 주민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있었는지 꼼꼼하게 적어 놓았지만, 가끔씩 기독교도의 존재가 발견될 뿐 대부분은 ‘사라센’이거나 ‘우상숭배자’ 즉 불교도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14세기 전반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경우는 이들과 달랐다.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 출신인 그의 발길은 아시아의 거의모든 지역에 미쳤고 그의 여정은 무려 12만km에 이르러, 마르코 폴로의 여행조차도 그에 비하면 빛을 잃을 정도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여행기(Rihla)로 남겼는데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사실은 그가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문화적 고립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어디를 가나 자신과 동일한 종교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모스크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가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으며 성장하다가 나중에는 그 통치자들까지 자신의 종교로 개종시키고 결국 거대한 제국의 영역을 포교의 무대로 삼았던 것처럼, 이슬람 역시 몽골제국의 군주들을 무슬림으로 바꾸어 놓고제국 영내의 대부분의 지역을 이슬람권으로 바꾸어 놓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초기 기독교처럼 가혹한 박해의 역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적인 지위를 보장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몽골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이슬람은 중근동의 지역적한계를 넘어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슬람이이처럼 확대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상인들의 역할이었다.
‘팍스 몽골리카’는 그전까지 관계가 소원했던 지역들 사이의 경제적 교류를활성화시켜, 지중해 연안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육상은 물론 해로를통한 원거리 교역이 발달했다.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단일한화폐단위도 통용되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러시아와 중동을 지배하던 몽골의 귀족들은 자신이 축적한막대한 재화를 국제상인들에게 위탁하여 더 많은 이익을 올리려 했다.
중국에서소위 ‘알탈상인(斡脫商人)’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들은 대부분 무슬림들이었고, ‘알탈’이라는말도 실은 ‘동업자’를 뜻하는 ‘오르탁(ortaq)’이라는 투르크어에서 나온 것이었다.
몽골귀족과 무슬림 상인들 사이의 이같은 ‘정경유착’이 결국 몽골제국 지배층의 이슬람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되었다.
우리의 고려가요에서 쌍화점의 주인으로 묘사된 ‘회회(回回)아비’도 무슬림 상인에 다름 아니었으니, 이들의 활동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있다.
이슬람의성공을 가져온 또 하나의 요인은 이슬람 신비주의 운동의 확산이었다. 이슬람이라는종교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원했고 그 경전인 꾸란(Quran)도 아랍어로 씌여졌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꾸란을 성경처럼 단지 신의 말씀을 인간의언어로 옮긴 것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절대신 알라와 함께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것, 즉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근대 이전에 이것을 아랍어 이외의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것 자체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꾸란에 근거해서 성립된 율법은고도의 아랍어 지식과 오랜 수업을 거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무슬림 대중들은 자신의 신앙을 소수의 율법학자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는 신앙의 형식화 및 형해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에대한 반발로 시작된 것이 바로 신비주의 운동이었다.이 운동의 뿌리는 금욕과 고행을행하며 절대신 알라의 존재를 스스로 직접 체험하려는 사람들 _ 아랍어로 ‘수피(sufi)’_ 에서 나왔지만,후일 유명한 수피들을 중심으로 교단이형성되면서 대중적 운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수피 교단은 각지에 수련장을설치하고 무슬림 대중들을 ‘제자’로 입문시키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수피 교단은 어려운 교리의 설명이나 해석이 아니라, 금식과 수련 그리고 구휼과 치유를 통해 대중들에게 접근했던것이다.
더구나 ‘학문적’ 접근을 기피하는 수피들은 각지의 토속신앙들을 흡수하고 수용했기때문에 비아랍계 민족들의 개종을 더욱 용이하게 했다.
무슬림상인들과 신비주의 수피교단의 활동에 힘입어 몽골제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이슬람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와 흑해 북부를 지배하던 킵착칸국, 중동의 일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칸국의 군주들과 주민들이 대부분 무슬림으로바뀌었다.
비록 원나라의 황제들은 티베트불교를 신봉했지만 그들이 지배하던시대에 이슬람은 중국 영내에도 굳게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의확산은 몽골제국 영내에서 다른 종교의 쇠퇴를 가져왔다.중앙아시아와 초원지역을 무대로 적지않은 교세를 갖고 있던 불교와 기독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특히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에 속하는 동방기독교는 몽골과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적지않은 추종자들을 갖고 있었으나,이슬람의 압력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중앙아시아 키르기즈 공화국의 수도 비시켁 부근에서 동방기독교도들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고 거기서 수백개의 묘지명들이 출토되었다.
모두 시리아 문자가 새겨진 이 묘지명에는 사망한 사람의이름과 사망연대가 기록되어 있다.시대적으로는 8~9세기에서 14세기까지 수백년에 걸친 것들이지만 1340년대를 최후로 더 이상 묘지명들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몽골제국 말기에 아시아의 기독교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사라지고 이슬람의 세계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것이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슬람 정신은 평등 단 남성에게만…
‘한 손에는 꾸란(코란), 한 손에는 칼.’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이슬람의 세계 확산 요인을 가르칠 때마다 꼭 등장하는 말이다.
믿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슬람을 믿었다는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역사에세이팀이 찾아간 이슬람 국가인 우즈베키스탄과 터키의 예를 보면 이슬람은 결코 겁을 주어 포교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이슬람 안에서의 평등을 내세운 것이 계급적인 차별에 시달리던 당대의 민중들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면 이런 평등정신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우선 바닥이 널찍하고 평평하다. 왕족이나 귀족을 위해 별도의 자리를 마련한 성당과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
두드러지게 높은 곳이라고는 이맘(꾸란에 정통한 자)이 앉는 좌석 정도인데 그 나마도 겨우 엉덩이를 댈 정도로 약간 높게 계단 하나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소박하다.
또 이맘도 특정한 계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꾸란을 열심히 익혀 그 내용에 해박해지면 될 수 있다.
또 문이 언제나 열려있다. 벽돌과 석재로 거대하고 견고하게 지은 수십미터 높이의 이슬람 사원도 문은 가죽과 천으로 되어 있어 누구나 장막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 때나 기도하러 찾아갈 수도 있게 하지만 가난한 노숙자가 추위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방어막 구실도 해준다.
심지어 소수의 이슬람들이 사는 러시아에서 이슬람 사원과 러시아 정교성당이 겉모습은 비슷하게 생겨서 ‘언제나 열려 있는 문’으로 이슬람 사원여부를 판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평등과 개방의 정신은 남자들만에 국한됐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여자들은 사원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수건으로 가려야 한다.
이스탄불의 사원 입구마다 남자가 한 명씩 서있어서 머리수건이 없는 이에게는 천을 빌려 준다. 사원 안에서도 이맘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앞쪽 가운데는 남자들만이 앉을 수 있다. 여자들은 바깥쪽에만 앉아야 한다.
개방된 21세기에도 이 원칙은 바뀌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슬람이 자꾸 고립되어 가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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