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3막이 끝나고 여러 번의 커튼콜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관객은 자리를 뜨지않았다.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치면서 막이 내리는 것을 아쉬워했다.한국의 발레단이 이런 장렬한 대작을 이만큼 해낸 것이놀랍고 자랑스럽다. 무더운 여름 두 달 이상 이 작품에 매달려 땀 흘린 무용가들의 노력은 뜨거운 감동으로 돌아왔다. 한국 발레사에 새로운 획이그어지는 순간이었다.
국립발레단의 ‘스파르타쿠스’ 초연(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한마디로 역사적 사건이다. 하차투리안의 박진감 넘치는 음악에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안무한이 작품은 볼쇼이의 자랑이자 볼쇼이 외엔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내기 힘든 대작이다.
죽을 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는 엄청난 에너지와, 주역부터솔리스트, 군무까지 최고의 기량을 요구한다. 그들은 해냈다. 그리고, 한국 발레와 국립발레단의 성장을 과시했다.
주역들은 혼신의 열연을 펼쳤다. 노예 반란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로 나온 이원국은고상하고 위엄에 넘치며 강한 영웅의 낭만적 면모를 보여줬다.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를 맡은 김지영은 절정의 매혹으로 빛났다. 사랑하는 사람을다시 만난 기쁨과 행복감을 표현할 때 그가 보여준 춤은 얼마나 황홀하고 사랑스러웠던가.
스파르타쿠스의 주검 앞에서 비탄에 몸부림칠 때, 거칠고강한 몸짓에서 전달되는 격렬한 슬픔은 관객의 가슴을 찢어버렸다.
청순가련한 시골처녀 지젤이나 슬픔에 잠긴 우아한 공주 오데트로 알려졌던 김주원은야망과 관능의 화신 예기나로 놀랍게 변신했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로마 장군 크라수스 역의 신무섭은 광기마저 느껴지는 열연을 했지만, 로마 최고의권력자다운 자만심과 당당함으로 무대를 제압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였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남성 군무는 아쉬움을 남겼다. 폭발적 에너지의 웅장한스펙타클을 펼치기엔 일단 숫자가 부족했다.
각각 10명, 12명 밖에 안되는 스파르타쿠스군과 크라수스군의 전투는 소규모 격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군무의 기량이 예전보다 크게 성장한 것은 분명했지만, 관객이 기대하는 최대치에는 못미쳤으며 특히 객원이 다수 투입된 크라수스의 병사들은 잘 훈련된군대의 일사불란한 균제미를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대 위에 뿜어내는 에너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박진감으로 관객을 흥분시켰다.
솔리스트 중에는 최세영의 춤이 도드라졌다. 예기나의 유혹에 넘어가 욕망에 미쳐버린목동을 춤출 때 그가 보여준 열연은 오랫동안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이번 공연의 성공은 절반이 지휘자 라부르누크의 공이다. 미친듯 날뛰며 포효하는타악기와 금관악기의 울림, 우수 어린 서정적 현의 노래가 복잡하게 얽힌 까다로운 음악을 흔들림 없이 지휘(연주 코리안심포니)함으로써, 무대를 안정감있게 받쳐줬다.
국립발레단의 이번 공연을 원산지 볼쇼이의 수준과 비교한다면, 물론 부족한 게많다. 주역들만 해도 스파르타쿠스 이원국과 크라수스 신무섭은 영웅과 권력자의 카리스마를 더 강하게, 예기나 김주원은 성적인 매력 못잖게 교활하고야심에 찬 여자다운 차가움과 단호함을 더 분명히 드러냈으면 좋겠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라는최고봉을 밞음으로써, 국립발레단은 도약의 자신감을 얻었다. 그것은 한국 발레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영웅적 발레 ‘스파르타쿠스’는 9월 1일까지 계속된다. 예기나 김주원 외에 다른 주역은 이원국-김지영-신무섭, 김용걸-배주윤(30일 김애정)-장운규가 번갈아 나온다. (02)587-6181
“한국에 스파르타쿠스가 있다.”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이원국을 두고 한 말이다. 국립발레단이 이 작품을 공연하기로 결정하고도 과연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할 때 그리가로비치는 그렇게 격려했다. 이원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원국을 위한 작품이었다.
■스파르타쿠스역 이원국
첫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에서 만난 이원국은 “인사하러 나갔을 때 객석 앞줄 관객의 표정을 보고 성공했음을 느끼고 기뻤다”고 말했다.
직업 무용가로 무대에 선 지 8년, 한국 최고의 발레리노로 수많은 작품에서 주역을 한 그로서도 “가장 힘든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지구력이 제일 문제였습니다. 3막 내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데, 어디서도 힘을 아낄 수 없게 돼있는 작품이라 끊임없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그는 스파르타쿠스를 강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춘 영웅으로 파악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반란을 일으켜 성공을 확신하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를 걱정합니다.
그런 내면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외면적으로는 영웅다운 남성적 강인함을 보이는 인물이지요. 완벽한 테크닉과 체력, 내면적 성숙을 모두 갖춰야만 출 수 있는 배역이지요.”
“첫 공연의 긴장감 때문에 최상의 무대는 아니었다”는 자평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쏟아진 열광적인 갈채는 한국 남성 발레 시대를 연 무대 위의 영웅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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