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너는 시인이 되리라.”
아르튀르랭보(1854~1891)는 열네 살에 신탁(神託)을 받았다. 샤를르빌 신학교의 2학년 수업에서 3시간 넘게 토론한 호라티우스의 시였다. 소년 랭보는금빛 나는 양과 월계수에 둘러싸인 시인의 노래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했다.
피에르프티피스는 랭보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랭보 전문가이다. 프티피스는 평전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의 서문에서 “랭보에 대한 ‘신화’는 많지만 ‘전기(傳記)’는 드물다”고 말했다.
찬란한 업적에 가려졌던 인간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평전을 쓰는사람들의 공통된 지향점일 것이다. 그 작업은 업적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성품이 선하면 선한 대로 고약하면 고약한 대로,혈과 육에 가까워질수록 망자에 대한 애정은 깊어진다. 프티피스도 랭보의 ‘전기’를 쓰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고지식한 어머니 비탈리와잘생긴 아버지 프레데릭의 연애사부터 기술했다. 아르튀르는 그들 부부가 낳은 두 번째 아들이었다.
프티피스의‘인간 랭보’는라틴어와 고전 암송, 역사 과목에는 뛰어났지만 수학에는 도통 재주가 없었다. 나눗셈 하나도 제대로 못했고, 수학문제의 답으로 라틴 시를 써내곤 했다.
아르튀르가 열두 살 때 그의 담임은 교장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눈빛과 미소가 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 아이의 말로가 안 좋을 거예요.” 악의에 찬 평가였겠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섬뜩한 예언으로들린다.
저자는 인간 랭보의 또다른 모습을 1871년의 파리행에서 찾는다. 랭보는 엄격한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파리로 도망쳤고, 파리코뮨에 가담했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이상으로 가득찬 ‘파리의 전투가’와 ‘공산주의 헌법론’을 썼다. 화폐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을 없애며, 모든 시(市)가 독립적으로 존재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코뮨에서의 실제 생활은 그러나 추잡스럽고 역겨웠다. 그는 ‘강탈당한마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내 슬픈 마음 선미(船尾)에서 침 흘리네./ 담배로 뒤덮인 내 마음./ 그들이거기다 수프를 던진다.’ 평전의저자는 부르주아의 아들 랭보가 ‘혁명은 사랑했지만, ‘손이 더러운’ 혁명가들은 사랑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해5월 랭보는 교사 이장바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인으로서의 각성을 체험한 ‘투시자의편지’였다. “저는 최대한 방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투시자가 되려고 합니다…그것은 모든 감각을 착란시킴으로써미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랭보는투시자를 ‘신이 만들어낸 사물 속에서 내세를 보는 사람’으로 파악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방탕해져야 투시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시골출신 젊은이가 당대의 거장 폴 베를렌느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정신이 스며 있었다. 베를렌느가 자신도 갖고 있는 이 ‘비정상적인’ 정신을알아보았음은 물론이다.
영화 ‘토탈이클립스’(1995년, 감독 아니 예츠카 홀랜드)로 유명해진 랭보와 베를렌느의 사랑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베를렌느는 신혼의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방랑의 여행을 떠났다.
술과 약물에 취해 있거나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손목과 허벅지를 칼로 찔렀고, 조끼에 유황액을 붓곤 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썼다. ‘아니야, 순수한 물을 더,/ 유리컵의 이 물꽃들을,/ 전설도 영상도/ 내 목을 축이지 못한다.(‘갈증의 희극’) 방랑이계속되면서 베를렌느는 나약해졌다.
그는 이혼소송에 대한 두려움,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하염없이 울었다. 낙담과는 거리가 멀었던 ‘초인’ 랭보는이 한심스런 연인과의 결별을 선언했고, 분노한 베를렌느가 총을 겨누었다. 랭보는 손목을 가볍게 다쳤으며 베를렌느는 투옥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랭보는산문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시집 ‘일류미나시옹’을발표했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인간 랭보’를 탐구하기 위해 프티피스는‘지옥…’ 이후 랭보의 여행과 모험을 좇는 데 공을 들인다. 랭보는 네덜란드와 독일, 이탈리아 등 각지를 유랑했다.
아라비아의아덴으로 건너가면서 랭보는 거액의 재산을 쌓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무기 매매와 마약 거래, 인신 매매 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아프리카의하라로 옮겨간 뒤 관절염이 암으로 발전했다. 마르세이유에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암은 전신에 퍼진 뒤였다.
1891년 11월 10일 랭보는콩셉시옹 병원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콩셉시옹(conception)은 ‘잉태’를 뜻하는 단어다.
인간 랭보는 이날 눈을 감았지만, 시인 랭보의 삶은 그가 사망한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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