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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폼페이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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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폼페이 최후의 날

입력
2001.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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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8월24일 이탈리아 나폴리만 연안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인근의 도시 폼페이를 삼켰다.기름진 캄파니아 평야의 길목에 있었던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제정 로마 초기에는 귀족들의 별장이 여기저기 들어선 휴양지이기도 했다.

베수비오산은 높이가 1,281m로, 유럽 대륙의 유일한 활화산이다.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다.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지진으로 산기슭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79년 8월24일의 대분화는 폼페이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다.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삽시간에 시가지를 덮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 수천명이 사망했다.

이 참사는 영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리턴의 장편 역사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1834)에잘 묘사돼 있다.

아테네 명문가 출신의 청년 글라우쿠스와 그의 연인 이오네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날에 눈먼 여자 노예 니디아의 도움을 받아 바다로 피신한다는 이야기다.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져 있었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의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발굴이 본격화해 지금까지 옛 시가의 절반 정도가 발굴됐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들은 대부분 나폴리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폼페이는 그 전성기에 갑자기 파묻혔으므로, 로마인들의 도시 생활을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 자료들은 당시 로마인들이 매우 쾌락적이고 현세적인 생활을 영위했다는 통설을 보강해주고 있다.

베수비오산은 79년 8월의 대분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분화를 겪었다. 그 가운데 가장 참혹했던 것은 1만8천명의 희생자를 낸 1631년의 분화다. 20세기 들어서도 1973년과 1979년에 분화가 있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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