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소련의 보수파 쿠데타가 새삼 국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불과 넉 달 뒤의 소련 체제 붕괴를 재촉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올바로 평가하는 것은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토대일 것이다.그러나 서구언론이 서구적 가치와 이해를 잣대로 러시아를 재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기존 체제와 가치는 사악하고, 이에 도전하는 세력과 논리는 선한 것으로 전제하는 악습이다.
서구는 당초 소련 체제의 발본개혁을 시도한 고르바초프에 환호했다. 그러나 그가 완고한 공산 독재와 냉전의 질곡을 깬 20 세기의 위인으로 우뚝 서자, 개혁 노선을 시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KGB 의장과 국방장관 등 보수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는 애초 성공할 수 없는 자포자기적 저항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최근 보수 세력이자 신들을 교체하려는 대통령과 측근의 논의를 도청,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그 쿠데타 군은 임무를 모르고 실탄도 없었으며, 민중에 발포할 의지는더욱 없었다. 민중 시위에 무력하게 물러 선 쿠데타 주역들은 아프리카 하사관보다 서툴었다는 비웃음을 받을 정도였다.
이 대목에서 서구 언론의 평가는 엇나갔다. 쿠데타 실패는 체제의 중추인 군과 KGB까지 민주화 대세가 지배한 결과이고, 그 광범한 민주화는 다름 아닌 고르바초프의 업적이라는 것이 냉철한 평가다. 이는 고르바초프가 민족을 낙원으로 이끈 예수는 아닐지라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모세라는 칭송이 상징한다.
그러나 다수 서구언론은 쿠데타를 고르바초프 개혁의 총체적 실패로 규정한 채, 민중 시위의 선두에 선 옐친을 민주화 영웅으로 치켜 세웠다. 언론의 선정성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거대국 소련과 거인 고르바초프의 몰락을 기꺼워하고 재촉하는 심리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물론 옐친과 러시아를 선택한것은 러시아 민중이다. 부진한 경제 개혁에 실망한 민중이 고르바초프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유산을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서구가 고르바초프 경제 개혁을 지원하는데 인색했고, 급진적 시장경제 개혁을 표방한 옐친을 진정한 구세주인양 치켜 세워 격동기 혼란에 처한 러시아민중을 현혹한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그 옐친은 10년 동안 온갖부덕과 무능, 기행을 연출한 채 안팎의 경멸과 조소에 쫓기듯 퇴장했다. 대국 러시아를 황폐한 제 3 세계 국가 같은 처지에 빠뜨린 다음이었다.서구 언론의 패턴에서는 옐친과 대조되는 자질로 민중의 기대를 모은후계자 푸틴이 긍정적 평가를 받을 차례였다.
그러나 민족 자존심 회복을 외친 푸틴이 도탄에 빠진 국정을 빠르게 추스르자 서구는 다시 독재를 탓하고 있다. 옐친 시대 산업과 금융, 언론까지 장악한 타락한 올리가르키(과두지배세력)의 악덕과 폐해를 강조하던 서구 언론이 이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자본과언론 탄압으로 매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좁게 보면 언론의 심술이지만, 근본은 러시아를 서구 문명권 바깥으로 치부하려는 역사 깊은 편견의 소산이다.
좌절한 개혁자 고르바초프는최근 독일 언론 회견에서 푸틴의 개혁 노력을 지지하면서 “역사는 변덕스럽지만, 결국은 정당하다”고말했다. 불발 쿠데타 10년에 즈음, 서구 언론이 옐친 아닌 고르바초프를 다시 찾는 것은 그 역사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단면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러시아의 부정적 측면을 제정 러시아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안목이다. 소련 공산체제 70년의 잔상(殘像)에만 집착하는 것은 불행한 냉전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냉전 시대의 현인 조지 캐넌은 인류에 비극적이었던 20 세기의 고난을 어느 민족보다많이 짊어진 러시아 민중에 대한 동정과 이해가 국제 평화의 관건임을 일찍이 지적했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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