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사극의 전성시대인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밤 10시 넘어 텔레비전을 켜면 일주일 내내 사극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역사물의 시청률이 높은 것은 그 내용이 종종 지금의 정치현실을 풍자하기 때문일지 모른다.몇 달 전 신임 법무장관이 '충성' '성은' 운운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며칠 만에 장관직을 떠날 당시, 사극의 인물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고 있었다.
요즈음 사극들은 우연인지 몰라도 대부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정치 세력간의 암투를 주로 다루고 있다. 몇몇 대신들과 궐내 여인들의 머리 쓰기는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허를 찌른다.
사극의 연장선상에서인가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킹 메이커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선 후보로 나서야겠다고 한다. 미국 방문기간 중 경륜을 갖춘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하더니 그 인물이 바로 자신임을 밝히고 있다.
스스로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행보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년 대선을 위해 직접 뛰어보겠다는 것인지 좀더 두고 볼 일이다. 못해본 것은 오직 한 자리 대통령이기에 개인적으로 욕심을 낸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 욕심이 우리의 정치 현실을 봉건적 사극으로 되돌리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JP가 우선 김영삼 전대통령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후 김대중 대통령과 논의하여 여권 단일후보가 되겠다는 발상은 사극을 뺨치는 것이다.
3김의 연대를 통해 대선 후보가 되겠다는 20세기식 생각으로 어떻게 21세기 한국정치를 이끌어가겠다는 것인가. 아직도 정당을 껍데기로 여기고 국민을 봉건적 농노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JP의 이러한 행보를 가능하게 한 전ㆍ 현직 대통령과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의 책임도 크다. DJ와 YS는 JP의 대선 행보를 행여나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 3김 정치를 부활시키려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대권주자들 또한 표가 된다면 정치적 소신도 마다 않고 누구에게나 넙죽 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내전기간동안 카리스마와 영웅적인 연설로 러시아인들을 감동시키고 사기를 높여 결속시킬 수 있었지만 그 후 러시아의 실용주의적 요구에 발 맞추지 못하여 권력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한국정치 리더십의 첫 번째 덕목은 무엇인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요되어진 지역분할과 지역패권주의를 청산하는 것이다. 지난 40여 년 간 특정지역에 기반한 3김의 정치행태와 정치권력의 독점으로 한국정치는 후진성을 벗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한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는데 그것은 3김의 차별성이다. YS, DJ 두 정치지도자는 암울했던 독재권위주의 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민주화투쟁을 하여 그 결과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JP는 개발독재와 유신을 끝으로 이미 정치생명을 마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경제발전과 안보에 일조한 정치인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1980년 이후 JP의 정치생명은 지역주의에 의해 연명해 왔다. 3당 합당을 통해서, 민주당과의 공조를 통해서 JP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도 지역주의를 이용한 줄타기의 결과였다. 이제 그 줄타기가 점점 위험해 보인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선택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JP는 명예롭게 21세기 정치를 후배 정치인들에게 물려주고 DJ와 정치행보를 함께 하는 것이 어떠할지. 그 후 3김이 함께 자서전을 남겨 놓으면 한국정치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필독서가 될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불후의 명작이 될 것이다.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몇몇 인물들의 정치놀음에 사극의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음을 TV 제작진들은 알고 있는지.
이정희교수 한국외국어대 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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