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의 ‘꿈’을 이제야 시작했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전광렬(39)은 그러나 가장 ‘적기’라고 했다.드라마 ‘허준’으로 TV에서는 정점에 올랐을 때야말로 새로 시작할 때라고. 영화배우로서의 출발은 그릇을 비우고 새로 담는 작업이다.
“유혹도많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방송국에서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그러나 ‘허준’의인기로 매너리즘에 빠지기 싫었다.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처럼 20여 년 TV연기로 충분히 훈련됐다고 생각한다.”
‘허준’이 끝나고 그의앞에는 수많은 작품이 밀려들었다. 그 중에서 선택한 것이 ‘베사메무쵸’(31일 개봉)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나 ‘가을의 전설’ 만큼은 아니지만 감동과 메시지가 있었고, 알고 보면 영화에 대한 갈망이 어느 세대 못지 않게 강한 중년을 위한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철수란 인물이 낯설지가 않았다. 지금은 자동차 딜러로 다시 일어섰지만, 몇 년 전 보증을 잘못 서 직장에서 쫓겨난 친한 친구가 떠올랐고,한때 사업한다고 달려들었다.
두세 번 실패해 힘들었던 자신의 모습 같기도 했다. “철수 역할을 하는데 부대낌이 없었다. 정서적 부조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억울한 사회구조를 탓하기 전에 자신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가족을 살리려 몸부림치는 철수의 모습이 애처롭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수 있는 상황이다.‘가족이 뭔가’ 반추 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했다.
그는 철수가 아내의 불륜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해피엔딩에 동의한다. 제작진도 한 달 동안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아이들의 눈 빛, 잠 잘 때 이불 밖으로 삐져 나온 발가락이야말로 성 모럴을 뛰어넘을 수 있는소중한 것이다. 영화가 할리우드의 ‘은밀한 유혹’으로 빠지지 않은 데는 아이들의 연기와 역할이 컸다.”
처음이지만 이미숙과의 호흡도 잘 맞았다. 워낙 휴머니즘이 강한 드라마를 많이했기에 감정표현도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울컥해 그 수위를 호흡과 여백으로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전광렬은 처음부터 큰 것을 얻겠다는 욕심은없다.
영화는 그에게 기다림이다. 20년을 기다렸고, 드라마와 달리 한 작품, 한 장면을 위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불혹에가까운 나이가 그 기다림의 의미를 알게 했고, 다른 ‘유혹’을 뿌리치고 영화에 전념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벌써다음 작품도 정했다. “내 생각대로 시나리오가 조금만 고쳐지면 권형진 감독의 ‘엠바고’에출연할 생각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어떤영화?
‘뜨겁게 키스해 주세요(Kiss me much)’란 뜻의 스페인어 ‘베사메무쵸(Besamemucho)’. 제목은 역설이다.
멕시코 한 여가수의 구슬픈 정열과 사랑에 대한 추억이 아니다. ‘베사메무쵸’(감독 전윤수)는 가족사랑에 대한 비가(悲歌)이다.
‘새끼를 살릴 수만있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어미의 본능.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법과 도덕까지 초월할 수 있는 가치인가라고 묻는다.
정직한 샐러리맨인 증권회사 과장 철수(전광렬). 한 푼이라도 더 싼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지하 식품점에서 달리기를 하는 네 아이의 엄마인 그의 아내 영희(이미숙). 한때 초등학교 1학년 국어책에 등장했던 그들의 이름만큼이나 평범하다.
아등바등, 알뜰하게쌓아올린 ‘그들의 성’이 타인에 의해 무너진다면. 양심적이란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철수, 설상가상으로 융자보증을 서 준 친구의 파산으로 한달 안에 1억 2,0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전재산인 아파트가 날아갈 위기.
둘은 그 성을 지키려 발버둥치지만 ‘동정없는 세상’은 그들을 외면한다. 그때 찾아 온 에드리안 라인 감독의‘은밀한 유혹’(1993년). 영화는 단순한 돈 1억 원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아내의 남자선배와의 하룻밤의 불륜을 포함시켰다.
‘베사메무쵸’는 과거비슷한 영화가 시도하기 어려웠던 사회구조와 성모럴을 비판한다.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사회에서 철수는 불법으로라도 정보를 캐 내 재기하려 하고, 아내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판다.
그리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무죄라고. 철수조차 잠자는 아이들의 발가락을 보고 아내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은밀한 유혹’이란상황 설정이 작위적이지만, 그것을 모성과 연결시킨 ‘베사메무쵸’는 최근 불고있는 우리 영화의 ‘한국적 정서에 충실하기’와 맥을 같이 한다.
설문조사결과 영화를 보고 난 20, 30대 여성 300명의 86%가 영희의 선택에 공감한다고 답한 것처럼, 그 정서에 영화의 논리적인 허점이나, 드라마적인구성까지 묻혀버린다. 그래서 어머니는 위대하다. 31일 개봉.
이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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