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하의 ‘의문사 1호’로 꼽히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 교수 사건은 최 교수가 간첩이란 증거가 없으며, 고문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양승규ㆍ梁承圭) 는20일 최 교수 의문사 사건은 지난 1973년 중앙정보부 발표나 88년 검찰 재수사 결과와는 달리 ▦최 교수가 ‘유럽거점간첩단’ 일원이라고 자백한 적이 없고 ▦중정 수사관에 의해 고문을 당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당시 최 교수‘피의자 신문조서’의 간첩자백 부분은 최 교수 사후 수사관들이 임의로 작성했음이 확인되는 등 “간첩임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나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최 교수의 사망원인과 관련, “‘고문 치사’에서 ‘투신 자살’까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일단 신중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고문과 사망간의 인과관계를 집중 조사하고 있다”며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위원회 관계자는 “시신사진과 검시기록을 검토한 결과 투신 자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드러났다. 더욱이 중정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피조사자(최교수)가 청사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화장실에 혼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투신자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 교수는 서울대 법대교수로 재직하던 73년 10월16일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 참고인으로 중정에 자진 출두했다 3일 만인 19일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73년 “최 교수가 간첩임을 시인한 후 죄책감에 투신자살 했다”고 발표했으며, 88년 검찰은“최 교수가 만류하는 중정 직원을 뿌리치고 화장실에서 투신했다”고 결론짓고 관련 직원을 관리소홀로 문책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한 바 있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최교수 가족 한많은 28년
“감춰진 진실의 한 조각을 밝히느라 28년을 허비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억압에 스러진 서울대법대 최종길(崔種吉ㆍ당시 42) 교수가 1973년 중앙정보부 발표와 달리 ‘유럽거점 간첩단’ 일원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20일, 아들 광준(光濬ㆍ37ㆍ사진ㆍ경희대 법대 교수)씨의 반응은 오히려 담담했다.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최 교수의 누명이 벗겨지기까지 유족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선친이 의문의 주검으로 나타났을 때 9살이었던 광준씨는“중정의 감시가 지독해 의혹제기는 고사하고 추모미사마저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동생 종선(種善ㆍ54ㆍ재미 사업)씨의 뼈아픈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내가 근무하던 중정에서 형이 숨진 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81년까지 ‘호랑이 굴’에 계속 남아 숨죽이고 근무하는 등 정말 파란만장 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형제의 운명은 참혹하다 못해 비극적이다. 73년 10월16일 최 교수를 서울 남산중앙정보부 합동심문실에 자진출두케 한 사람은 바로 종선씨.
그 해 중정에 수석 합격해 감찰실에 근무하던 그는 남산에 온 둘째 형과 나눈 대화를 잊을 수 없다. ‘못난 동생 직장 한번 봐두시라.’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 다 들어와 보는구나.’
그러나 종선씨도 이날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을 보였다. 중정이 발표한 투신 시간이 모든 창문이 잠겨 있을 때였고, 1.5㎙ 높이에 있는 가로 1㎙, 세로 1.5㎙ 크기의 화장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는 최교수를 말릴 수 없었다는 발표를 사건발생 때부터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선씨는 당시 중정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적 충격을 가장,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뒤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후 종선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올해 3월 ‘산자여 말하라, 나의 형 최종길 교수는 이렇게 죽었다’라는 제목의 수기를 출간하는 등 ‘진실’을 파헤치는 데 몸바쳐왔다.
"관련자 처벌은 원하지 않습니다. 선친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정확한 진실을 알고 싶을뿐입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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