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8월18일 조각가 김복진이 39세로 작고했다. 한국의 첫 현대 조각가이자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김복진의 때이른 죽음은 조선의 예술계나 그의 가족에게는 큰 슬픔이고 손실이었을 테지만, 달리보면 그 자신을 위해서 복이랄 수도 있었다.그의 요절은 작품 활동의 절정기에 급서한 예술가가 흔히 누리는 신비롭고 싱그러운 이미지로 그를 감쌌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맞서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친일의 강요에서 그를 구해내 김복진이라는 이름에 민족예술가로서의 떳떳함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김복진이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예컨대 그의 아우인 팔봉 김기진이나 서양화에서 김복진과 비슷한 역할을 한 고희동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들의 귀에도 김복진이라는 이름은 설 수 있다.
그것은 김복진의 삶이 짧았고 그의 작품들이 6ㆍ25를 거치며 거의 소실돼 버렸다는 점 외에, 그가 조선공산당원이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우 김기진이 대통령 시절의 박정희와 가깝게 지냈음에도, 김복진의 삶과 예술은 그 시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그러나 김복진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20세기 전반기의 한국 예술사를 쓰기는 어렵다.토월회, 파스큘라, 카프 등 초창기 현대 예술을 주도했던 많은 단체들의 중심에 김복진이 있었다.
김기진과 박영희를 두 축으로 삼아 펼쳐진 카프내부의 이른바 ‘내용ㆍ형식 논쟁’에서 아우 김기진으로 하여금 박영희와 다른 맹원들에게 사과하게 해 이 논쟁을 내용주의자들의 승리로 마무리한 것도 김복진이었고, 그에 이은 ‘방향전환논쟁’에서 카프의 노선을 정치투쟁으로 전환시킨 것도 김복진이었다.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것은 시대의 어둠이었을 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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