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누구인가? 최근에 지식인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첨예화되는 동시에 대중적 관심을 촉발하고 있다.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정권의 지역적 교체 못지 않게 참여지식인 집단의 물갈이를 의미하는 것이고,이 물갈이가 초래한 회오리가 현재의 정치적 사안과 맞물려 사회 전체에 파장을 미치고 있다.
이런사정을 반영한 듯, 올 여름 서울대에서 개최된 논술경시대회는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이 감당해야 할 위상과 역할을 물었다.
응시자들은 당연히 요즘 언론사 세무조사 때문에 빚어진 논쟁의 주역들을 끌어들이거나 지난 날 신지식인의 표본으로 떠올랐던 인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한다.
그러다가 예수, 석가, 공자 같은 성인 군자나 조선시대의 선비를 거명한다. 안중근,전태일 같은 열사가 언급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역사에 기록된 이런 인물들은 모범적 지식인의 전형이고, 이런 전형에 비추어 근자에 지식인 양하는 사람은 왠지 모자란다는식이다.
이런답안지를 읽으면서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사례가 적절치 않기 때문도, 암기과목 답안지처럼 유사 사례의 행렬이 천편일률적으로 이어져서도 아니다.
오히려 주입된 지식일수록 사회적 통념이나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잘못된 사례로 뒤범벅된 청소년들의 논술답안은 어른들의 빈곤한사고 수준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이거울에 맺힌 일그러진 지식인 상을 들여다보면,보통 사람이 지식인에 대해서 거는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식인은 참된 지식의 소유자임은 물론 보통 사람이 결여하기 쉬운 양심,정의감 등 모든 능력과 미덕을 갖춘인간, 신적인 인간이어야 한다.
그 상상의 거울에 투사된 통념 속에는 사적인 욕망과 육체를 지닌 사람이 자리할 곳이 없다.그 통념 속으로 들어가기에는 그특수의 무게가 너무 큰 것이다.
언어학자들에따르면, 기원전 6세기 이래의 모든 문법책에는 언어활용 사례가 필수적 요소인 양 들어 있다. 사실 사례 없이 언어의 규칙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사례는 언어교육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교육과정에서 중요한위치를 점한다. 특히 추상적 진리에 대한 구체적 직관을 얻으려면 해당 사례에 의존하여야 한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에게 보행기가 필요한 것처럼, 이성적 사유에 능하지 못한 정신은 사례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정신적 홀로서기에 나선 자를 키우는 것은 8할이 사례인 것이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이 어려운 물음의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 학생들은 보행기를타고 왔다. 문제는 그들이 타고 있는 보행기가 조악한 장난감이라는 데있다.
그들의 추론이 엉뚱한 곳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여기에 있다. 그들이 의지하는 사례는 비현실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다시 언어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자면, 문법책에 나오는 사례는 대부분 선대의 책에서 빌려온 것이어서, 한번 사례로 채택되면 대대손손 살아 남는 반면, 새로운 사례로 채택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례의 행렬은 그만큼 보수적이고, 이 사례의 보수성 때문에 한 문화의 역사적 정체성이 보존되는것임을 알 수 있다.
문화적 공간 안에서 먼저 왔던 자는 나중에 오는 자를 가르치고부추기되, 사례의 자격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례는 과거와 미래의 교량, 문화적 전승의 매개체이다. 한 문화의 내용적 풍부성은 사례의 풍부성에서 온다.
그렇다면우리 사회는 지식인됨의 전형을 가지고 있는가? 청소년들의 글을 보고 이점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들의 마음 속엔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없다.
이는 우리가 현재의 역사적 현실에 걸맞는 지식인 상도, 그에 대한 공유된 관념이나 성찰도 모두 결여하고 있는지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커다란 공백을 메워야 하는 것은 물론 지식인의 몫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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