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17일 언론인겸 정치가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향년 57세.당시 수사당국은 장준하의 죽음을단순 실족사라고 발표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지었지만, 유족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오래도록 그의 타살 의혹을 제기해 왔다.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박정희와 그에 이은 전두환의 철권 정치 시절에는 입소문으로만 돌다가, 지난 1993년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타살을 주장하면서 처음으로 공론화됐다.
그 뒤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구성된 대통령직속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가 지난 4월 약사봉 일대를 항공촬영하고 5월에는 목격자를 소환해 치밀한 조사를 벌인 뒤 “타살의 혐의가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요컨대 당시 재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장준하를 박정희가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니다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가던 중 탈출해 충칭(重慶)의 광복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고, 해방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함께 귀국했다. 그는 신민당 국회의원 등으로 정계에서도 활약했지만, 그의 이름과 뗄 수 없는 것은 그가 1953년에 창간한 월간 종합 교양지 ‘사상계’다.
이 잡지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당시 한국 최고수준의 글을 실어 교양인의 필독 잡지가 됐거니와, 특히 문예면에 큰 비중을 두어문인들의 활동 무대를 크게 넓히고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뒤 ‘사상계’는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서다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1970년 5월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게재한 것이 발단이 돼 정부의 폐간 처분을 받아 그 해 9월 205호로 지령을 마감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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