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환경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웬지불안해….”사상 유례없는 저금리 행진속에 기업의 자금조달과 운용에 변화가 일고 있다. 대부분 기업들은 극심한 영업불황속에서도 저금리가 안겨준 금융비용 절감효과로 버텨나가고는 있지만, 내년이후 실물경기 및 금융시장에 대한 불투명성 때문에 저금리체제에 완전 적응하지 못한채, 포트폴리오 운영에 상당한 혼선을 겪고 있다.
■그래도 부채부터 줄인다
과거엔 고금리라도 돈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이젠 저금리인데도 대출을 사절한다. ‘빚 경영’의후유증을 워낙 호되게 경험한 탓에, 금리가 높든 낮든 이젠 부채부터 줄이는 쪽으로 경영철학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삼성전자는 부채비율이 47%까지 떨어졌지만, 하반기에 더 낮춘다는 방침. 2ㆍ4분기 차입금 7,000억원을포함, 1조3,000억원의 빚을 줄였던 삼성전자는 하반기 만기도래하는 1조9,000억원의 회사채중 4,000억원 이상을 갚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부채비율 75%인 롯데제과는 예금이자가 최근 5%대로 떨어지자 고금리 대출금은 우선 상환키로 했다. 회사 관계자는“6% 이상 금리를 적용 받는 대출금300억원을 우선적으로 갚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라면업계 1위 농심 관계자는 “연말까지 부채비율을 80%로 낮출 계획이었지만 실제 부채상환은 예상보다 늘어날 것 같다”며 “이자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단기부채 2,300억원 가운데 1,000억원을 상환키로 잠정결정했다”고 말했다.
■짧게 보고 운용한다
자금수급계획을 단기화하는 것도 이례적 현상. 다음 분기에 대비해 어느 정도 필요자금을 미리 조달하고 있지만, 극심한 ‘사재기’ 현상은 없다.
A그룹 자금담당자는 “자금을 미리 조달하면 어차피 예금으로 운용해야 하는데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간 상태에서 역마진(손실)만 커질 뿐”이라고말했다. 때문에 돈을 빌리더라도 가급적 단기자금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고민은 향후 금리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저금리가 내년에도 지속된다면 굳이 자금을 미리 끌어 쓸 이유가없지만, 만약 부실기업문제로 금융경색이 재연된다면 충분히 자금조달을 비축해야 한다.
B기업 자금담당간부는 “시장 불확실성 때문에 중장기적 자금수급 시나리오를 짤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저금리가 남의 일인 곳
연 11% 금리를 적용 받던 배관자재업체 사장 A씨는 이달초 거래은행을 찾아가 “시중금리가 한자릿 수로 낮아졌다는데 우리도 좀 깎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은행측 대답은 “이자를 올리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것.
A씨는 담판 끝에 금리 1%포인트 할인에 성공했다. 최근 담보부족을 이유로 대출퇴짜를 맞았던 합성수지제조업체 자금담당이사 B씨는 “저금리는 딴 나라 얘기다. 우리에겐 금리보다 돈을 빌릴 수 있느냐가 더 관건”이라고 말했다.
현 저금리의 특징은 ‘무차별 저금리’ 아닌 신용별 차등화를 동반한다는 점. 초우량회사채는 국고채 금리에 근접하는 연 6%대까지 떨어졌지만, 투자적격등급 최하위인 BBB-는 여전히 10%이상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금리격차는 6월이후 오히려 확대되는 추세다.
올들어 7월까지 A등급이상 우량기업은 8조원의 회사채를 발행했으나, ‘정크본드’인 BB이하 등급기업은 거꾸로 2조7,000억원을 순상환해야 했다. 돈을 빌려가야 할 기업(우량기업)은 돈을 쓰지 않으려 하고, 돈이 필요한 기업(비우량기업)은 돈을 쓰기 어려운 딜레마가 저금리체제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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