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의 친일파 명단을 9월 정기 국회에 제출해 이를 공개토록 하겠다는 윤경빈광복회 회장의 인터뷰 기사(본지 8월13일자 25면)를 읽는 마음은 착잡하다.그 착잡함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다는 자괴감에서오기도 하지만, 이번에라고 제대로 되랴 하는 학습된 비관에서도 온다.
해방 56돌을 맞도록 일본 제국주의의 협력자 명단 조차 정부 차원에서 공표하지못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의 힘이 너무 컸고, 그들과 연계된 세력의 힘이 지금도 너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일제하의 친일에는 여러 층위가 있어서 그것을 한 묶음으로 재단할 수는없다. 조선 민족의 미래를 일본 국가와의 완전한 통합에서 찾은 이념적 친일도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 이익을 취하거나 손해를 피하기 위한 타산적친일도 있었을 것이고, 별 생각 없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연루된 친일도 있었을 것이다. 일제하에서부터 지령을 이어오고 있는두 신문의 친일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두 신문이 일제하에서 민족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1920년대 말~30년대초의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는 그 신문들 가운데 한 곳을 둥지로 삼고 있었다.
그런 한편 이제는 누구나 알듯, 그 신문들이 낯뜨거운 친일을했던 것도 엄연하다. 사실, 식민지 시기에 합법 출판물로 나왔던 두 신문이, 더구나 전시 상황에서라면, 친일을 피하기는 정녕 어려웠을 것이다.
그 두 신문의 친일은 당대의 다수 지식인들도 피할 수 없었던 덫이었다. 지식인들만이 아니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 내선일체라는 허울 아래 강압적인동화 정책을 펼쳤으므로, 친일은 명망가에서부터 필부필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쉽게 피하기 힘든 덫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친일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친일에 면죄부를 줄 수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법적 기반이 일본제국주의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적어도 적극적 친일파는 해방된 조국에서 변두리로 물러나야 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실제의 역사는 첫걸음부터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제 한 몸 깨끗한 체하며 친일파를 권력기반으로 삼았던 이승만 개인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해방 공간을 메우고 있던 힘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힘의 관계는 민족 내부의 역학이기도했고, 국제 정치의 역학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힘의 관계를 뒤집지 못한 채 해방 반세기를 넘겼다.
논리적으로라면, 해방 공간에서 적극적 친일파에게 남겨진 길은 둘이었다. 첫째는,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비판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는, 비록 미국의 힘에 눌려 좌절되기는 했으나 대동아 공영권은 아시아인의 궁극적 미래라는논리를 굽히지 않은 채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국내의 소수파로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꾀많은 그들은 둘 다를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친일 사실자체를 부정하거나 숨긴 채, 이제 새로운 가치가 된 반공의 전사가 되었다. 그 꾀는 적중해 그들은 해방된 조국의 주류로 남았다.
그러나 이들의 꾀는 대한민국에 분열증을 안겼다. 대한민국이 걸친 옷은 과거의일본 제국주의와 그것을 계승한 지금의 일본 우익을 부정하지만, 대한민국의 속살은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우익의 자양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 한국 정부나 언론이 내지르는 항의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그래서다.
이제친일의 당사자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러나 적어도 역사를 바로 기록하는 일만은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한일 관계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윤경빈회장의 뜻이 이뤄지기를 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