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사회라면 존경받는 명문가의 핏줄로 대접받았을 그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애국지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워야 할 선조는 오히려 떨쳐내고 싶은 업보처럼 버거워 보인다.일제 강점기 할아버지, 아버지들의 고단하고 신산한 삶이 해방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에도 후손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는 탓이다.
자식들만은 식민지 백성의 불행한 삶을 살도록 하지 않겠다면 아낌없이 가산을 털었던 숱한 독립투사들.
그러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해방된 땅에서도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피폐해진 집안살림으로 인한 빈약한 교육, 빈곤한 취업기회의 악순환…. 친일·부일 인사들이 일제 때부터의 재력과 교육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삶을 재생산해 나가는 동안, 그들 독립투사들의 혈육에게 가난은 숙명이 됐다.
46주년 광복절에 즈음해 3ㆍ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유암(游菴) 홍기조(洪基兆) 선생의 증손 홍래준(洪來俊ㆍ69)씨를 찾았다.
병든아내…13평 임대아파트…
# 경기 용인시의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부인 고영애(高英愛ㆍ65)씨와 단둘이 사는 홍씨는 인터뷰 요청에 완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사는 모양이 이래서… 할아버지께 욕이 되는데…”
어렵사리 설득해 들어선 방에는 부인이 앓아 누워 있었다. 5년 전 척추를 다친데다 우울성 신경증과 소화기 장애가 겹쳤다는 것.
홍씨는 그동안 아파트 경비 등 허드렛일을 해 가며 생계를 꾸려 왔으나 최근 아내의 병이 깊어지면서부터는 집에서 병수발만 하고 있다.
수입은 월 80만원 정도인 군인연금이 전부. 고씨의 약값과 병원비를 대기에도 벅차다. 광복이전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 손자까지만 혜택을 주도록 한 연금규정에 따라 홍기조 선생의 3대손인 홍씨는 정부로부터 단 한푼의 은전을 받은 일이 없다.
33人 홍기조선생이 증조부
# 홍씨의 고향은 평남 용강면 오신면. 조선조 홍경래(洪景來)의 일부 후손이 멸문지화를 피해 숨어든 곳이라고 했다.
“대동강변 천길 낭떠러지를 가뿐히 뛰어넘었다는 홍경래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으면 어린 가슴이 두근두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집안의 고초도 꽤나 역사가 오래된 셈입니다.” 홍씨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비쳤다.
평안ㆍ황해도의 천도교 대접주를 지내는 등 고향의 정신적 지주였던 증조부는 종교계 대표자격으로 3ㆍ1 독립선언에 참가, 옥고를 치렀고 이후 온 집안은 일제시대 내내 일경(日警)에 시달려야 했다.
“다섯살 때인 37년에 증조부가 돌아가셨는데 정작 그 분의 활약상은 해방 이후에야 할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다들 쉬쉬했던 때문이죠.
집 뒤뜰에 묘를 썼는데 그 흔한 비석하나 못 세웠으니까요.”
그래도 독립운동가의 핏줄은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도 경성을 오가며 천도교 교화사업에 열중했어요.
어려워진 집안 탓에 소학교만 나온 아버지는 저를 들쳐 업고 경성에 올라가 막노동도 했었지요. 그 때부터 가난은 운명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해방후 반동분자 몰리기도
# 해방된 45년 그 해 웬일인지 증조부 산소의 아름드리 소나무 두 그루가 말라죽었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돌연 마을에 찬 바람이 일었다. “매일 저녁 집회가 열렸습니다.
새로 천도교위원장이 된 자가 우리 집안을 지칭해 ‘민중의 적’‘반동분자’를 외쳤습니다. 집에 돌아 온 아버지가 넋 나간 표정으로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안 어른들의 활동이 공산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홍씨는 6ㆍ25 발발 이태 전 중학교를 졸업하고 용강군의 외갓집으로 피신해 갔다. “어느날 아버지가 저를 찾아와 ‘집안이 반동으로 몰려 다 죽게 생겼다’며 한숨을 짓더군요.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안돼 인민군으로 징발됐습니다.”홍씨는 당시 마흔 셋이던 어머니와 두 여동생과의 이별을 회고하며 목이 메었다.
부대를 따라 경기 연천까지 내려온 홍씨는 ‘반체제 성분’ 가족출신의 동료들 몇 명과 탈영, 귀순했다.
국군 편입을 요청했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가 53년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났다. (홍씨는 생존해있을 지도 모를 북의 가족에 행여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말을 부인과 자식 외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이산가족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정부연금은 전혀 못받아
# 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홍씨는 54년 육군 하사관으로 지원 입대했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처지에 먹고 살 길은 그 길이 유일해 보였다고 했다.
57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월남해 온 부인 고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1962년, 홍씨는 뜻밖의 낭보에 접했다.
홍기조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대통령장을 받게 된 것. 그러나 증조부의 위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증손인 홍씨에게 주어진 실질적 혜택은 전무했다. 매년 3ㆍ1절과 광복절에 정부주최행사 참여를 요청하는 초청장이 날아드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해 3ㆍ1절 기념식에서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가보처럼 간직해오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몇 년 전 없애버렸다.
이날도 홍씨는 행정자치부 장관 명의의 광복절 행사 초청장을 보여주며 “그래도 가긴 가야겠지?”라며 동의를 구했다.
네 자녀중 막내만 대학교육
# 공부에 한이 맺혔던 홍씨는 2남2녀의 자식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공부를 시키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박봉의 하사관 월급으로는 도저히 대학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나마 77년 제대한 뒤에는 고등학교를 보내기도 벅찼다.
“큰아들이 군에 입대한 지 얼마되지 않아 방을 정리하던 딸이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더군요. 대학합격 증서였어요.
대학에 붙었다는 말은 못하고 속이 상해 훌쩍 군에 가버린 것이죠. 억장이 무너지더군요. 제대 후에도 마음을 못 잡더니 결국 절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맏아들은 18년 전 출가, 승려가 됐다. 넷 중 대학을 다닌 것은 막내아들이 유일. 광복회에서 얻은 장학금 덕분에 겨우 가능했다.
지금은 모두 객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했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쁘죠. 언젠가 ‘우리를 많이 가르쳤으면 지금보다는 나을텐데’라고 딸이 한탄을 하더군요. 참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홍씨는 올해 3ㆍ1절 기념행사 후 정부관계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연금은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교육만큼은 정부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으나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독립투사 후예 긍지 있지만…
# 홍씨가 증조부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제대 후 ‘민족대표 33인 유족회’에 가입하고서부터 였다.
누가 물으면 답변해 줄 수 있을 정도는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천도교회와 학자들을 찾아 다니며 작은 사실들을 알아낼 때마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라는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요즘 한 대학교수가 모 신문에 쓴 “3ㆍ1운동은 기층 민중의 자발적 주도에 힘입은 것으로, 민족대표 33인의 활동은 과장ㆍ왜곡된 것”이라는 글에 잔뜩 흥분해 있다.
“그 교수를 직접 찾아가 논쟁까지 하고 왔다”는 홍씨는 “그렇다면 지금껏 나와 우리 집안이 겪은 고초는 과연 무엇이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홍씨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부인의 면박에 곧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독립운동이 무슨 업보인지….
지금이 벌써 몇 대째 입니까. 이제는 손주들 대(代)나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참, 그때도 독립운동가라는 말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네요.”
노원명 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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