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부터 아들까지 3대에 걸쳐 항일운동을 뒷바라지하다 일경의 고문으로 두 눈을 실명한 뒤 후유증으로 숨진 김 락(金 洛ㆍ1863~1929) 여사가 광복절인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김 여사의 시가는 시아버지,남편, 아들 형제 등 3대 8명이 국가의 위훈을 받았고, 친정도 오빠 등 5명이 독립운동 관련 위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집안이다. 또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ㆍ1932년 작고) 선생을 형부로 두는 등 먼 친ㆍ인척까지 포함하면 무려 26명이 독립유공자이다.
‘일제경찰 극비본’의‘폭도사(暴徒史)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그는 시집을 가자마자 구한말 영남지역 의병장인 시아버지 이만도(李晩燾) 선생이 1910년 을사조약 체결 후 단식투쟁을 벌이는 것을 뒷바라지 했다.
그는 단식 24일만에 숨진 시아버지를 이어 안동지역3ㆍ1운동과 파리만국평화회의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한 남편 이중업(李中業ㆍ1921년 작고)의 아내로 다시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으며, 남편 대신 일경에 붙잡혀가 고문을 받다 두 눈을 실명하는 고초까지 겪었다.
이후에도 아들인 동흠(棟欽ㆍ66년 작고) 종흠(棕欽ㆍ72년작고) 형제의 독립운동을 돕는데 여생을 바치다 고문후유증으로 쓸쓸히 죽어갔다.
김 여사의 증손자 이동석(李東奭ㆍ57)씨는 “어릴때부터 선친들이 일본군과 싸운 독립운동 무용담을 듣고 자랐는데 그 뒤에는 항상 종조할머니의 내조가 있었다”며 “사후70여 년 만에 공을 인정 받아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한편 애국장이 추서된 안창남(安昌男ㆍ1901~30) 선생은 우리 영공을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18세 때 일본에 건너가 조종사가 된 그는 1922년12월 여의도에서 수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을 해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이로 인해 “떴다 안창남, 보아라 엄복동”이란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후 상하이(上海)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한 그는 29년 비행대 설립을 위해 국내에 파견된 공명단 단원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등 독립활동을 펼치다 30년 4월 비행훈련 중 추락해 사망했다.
전준호기자
jhjun@hk.co.kr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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