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관객 50만 명으로 입이 찢어질 충무로 제작자는 별로 없다. 어느새 관객 100만 명이 흥행의 지표가 되고 있다.”1990년대 한국의 대표 영화였던‘서편제’(1993년)의 관객은 103만 명이었다. 10년도안 돼 800만 명(‘친구’) 시대가 왔다. 그러나 한국영화 흥행은 어느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다.
▦기획력의 승부, ‘재미있는’ 영화
완성도 높은 오락영화가 줄줄이 나오고있으며, 그것을 즐길 만한 관객층이 형성됐다. 상업영화에서는 강제규, 박찬욱, 곽경택, 김상진, 작가주의에서는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등 데뷔5년 내외의 소장파 감독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30대 중반~40대 후반의 감독과 호흡을 맞추는 스태프도 세대가 같다. 심재명, 신철, 오정완등 프로듀서들이 비슷한 또래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가 분단국의 아픔에 일정한 궤를 맞추고 있다면, ‘친구’는 복고적 취향, ‘신라의 달밤’은 30대까지 아우르는 유머, ‘엽기적인 그녀’는 신세대의 독특한 취향을 영화로 만들어 성공했다.
기획력 중심의 상업영화적 성향이 강한 것이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1990년대 육성된 프로듀서들이 철저한 기획,완성도 높은 시나리오, 유능한 감독 발굴로 예술성도 상업성도 모두 어정쩡했던 80년대 한국영화의 함정을 돌파했다”고 분석했다.
▦커지는 제작비
웬만한 영화의 제작비가 20억~30억원이고, 곧 개봉할 ‘무사’가 70억 원,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100억 원이 넘게 들어갈 것으로예상되고 있다.
‘친구’ 신라의달밤’ ‘엽기적인 그녀’ 모두 제작비(마케팅비 포함)가 20억 원 이상인작품으로 이 수준이면 요즘 영화계에서는 평균 단가 정도다. 금융 자금의 유입으로 충무로는 그야말로 돈이 넘쳐 나고 있다.
▦막강한 배급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영화의 ‘혈맥’이라 할 국내 배급사들의 힘. 디즈니,UIP 등 미국 직배사들 못지않게 커졌다. “콘텐츠(영화)가 바로 배급의 힘”이라고 직배사의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
영화가 경쟁력을 갖추게 되면 당연히 극장들은 재미있는 영화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중고생들의 방학 시즌인 7월 중순~8월중순 한국 영화가 주요 극장을 잡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우리 영화는 하나 정도가 걸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의 경우 외국 직배사들의 극장을 빼앗고 들어갈 정도로 배급력이 커졌다. 지난 1년 간 시네마써비스, CJ 엔터테인먼트, 튜브엔터테인먼트 등 국내 3대 배급사의 파워가 몰라 보게 커졌다.
▦멀티플렉스의 약진
IMF 이후의 달라진 소비 행태및 늘어난 멀티플렉스 극장도 빼놓을 수 없다. 소비심리는 위축됐지만 ‘일상의 탈출구’로서의 영화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커졌다.
여기에 생활근거지로 다가간멀티플렉스가 늘어나면서 잠재 관객을 끌어들였다. 지난 해 6,000만 명이었던 영화관람 연인원은 올해 7,000만 명 수준으로 전망된다.
CGV,메가박스, 롯데 등 3대 멀티플렉스의 지난 해 전국 관객점유율은 36%였다. 지난 해 720개였던 전국 스크린 수는 올 연말이면 840개까지 늘어난다.
쾌적한 멀티플렉스의 등장은 20대중심의 영화관람층을 30~50대로 확대시키고, 가족끼리 볼 만한 오락영화나 자막이 없는 한국영화에 대한 수요를 높였다.
▦그러나…
‘O.P.M(Other People’s Moneyㆍ남의 돈)’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풍부한 자본 역시 한국영화시장의 경쟁력을 강하게만든 요인이다.
그러나 우리 영화계가 ‘투기 자금의 집중유입-대형 장르영화만개-시장 축소’의 길을 걸은 홍콩처럼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상업영화는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반면, 해외 3대 영화제에서 수상작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아직 한국 영화는 ‘반쪽 경쟁력’만을 갖추고 있다.
상업성이 큰 장르영화에만돈이 몰리고, 미국 직배사를 닮은 ‘힘의 우위’식 배급논리가 지배하는 데다 예술영화의 기반은 점점 취약해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
게다가 한국영화 시장이 커지면서 미국의 스크린쿼터 폐지 압력도 거세질 것이 뻔해 영화계의 걱정은 적지 않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대기업들 "영화시장을 잡아라"
제2의 중흥기를 맞은 한국영화 시장을 선점하려는 대기업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이미 뿌리를 내린CJ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동양제과, 롯데 등이 ‘제2기 대기업 영화시대’를 노리고 있다.
한국영화 중흥을 이끈 것은 금융자본. 1970, 80년대 외화 수입의 이윤을 국산 영화에 투자하던 토착자금을 1990년대 들면서 금융자금이 대신했다.
“투기성 짙은 핫머니가 언제 시장에서 빠져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영화시장이위태롭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본은줄을 잇고 있다.
1,500억 원을 상회하는 영화진흥기금을 제외하고도 현재 17개에 1,660억 원에 달하는 각종영화펀드가 개설되어 있다.
지난 해 한국영화 제작비 820억원 중 대부분이 이 자금으로 운용된 것이다. 벤처캐피탈인 KTB네트워크의 하성근 엔터테인먼트팀장은 “영화 투자조합의 존속기간은 5년으로‘핫머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대형투자사들은 일종의 연대를 통해 한국영화 시장의 인프라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 투자시장의 새로운 강자는결국 대기업이 될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투자사 대표는 “제작, 배급은 물론 극장까지 갖고 있는CJ엔터테인먼트의 경우는 미국식 스튜디오로 성장할 유아단계라고 보면 좋다.
이는 우리 영화계가 할리우드식의 제작 시스템을 갖춰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CJ엔터테인먼트는 ‘공동경비구역 JSA’ ‘단적비연수’ 와 앞으로 개봉할 ‘무사’ 등 17개 영화의 국내외 판권을 보유하고 있다.
배급은 물론 여기에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 5개 도시, 7개 CGV극장체인(스크린 68개)을 통해 관객을 모은다. 이미 미국의 유니버설이나 디즈니처럼‘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케이블TV, 멀티플렉스 메가박스를갖고 있는 동양제과의 영화제작은 초읽기라고 영화계는 보고 있다. 튜브엔터테인먼트 합병이 무산되자 자체 제작 프로젝트팀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화점 일부를 극장으로 운영하고 있는 롯데도 움직이고 있다. 부산, 창원, 영등포 등 5개 지역에 극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17일에는 울산에도극장을 연다.
“1990년대대기업은 영화제작이나 비디오 등 제한적이었는데 반해 새로운 대기업들은 스튜디오를 지향하고 있어 한국영화 산업이 질적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박은주 기자
■올 가을에도 흥행예감作 많다
하반기에도 한국영화의 ‘흥행 바람’은 이어질 것 같다. 9월 8일 국내개봉에 앞서 미국 배급사 시사를 먼저 가진 ‘무사(김성수 감독)’는 현지에서 “김성수가 누구냐”는 반응을 일으켰다. 해외 배급에 청신호가켜지고 감독의 미국 진출까지 기대하게 한다.
1999년 ‘거짓말’로 베니스 영화제에 진출한 장선우 감독의 SF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연말쯤 개봉한다.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도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을 형사추리물과 결합한 독특한 이야기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상 역사극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이시명 감독), 고교 무협물 ‘화산고’(김태균 감독)도 독특한 소재로 이미 상당한 기대심리를 올려 놓았다.
류승완 감독의 여성버디 무비 ‘피도 눈물도 없이’, 스타캐스팅으로 관심을 모으는 장진 감독의 ‘킬러들의 수다’ , 한국 멜로의 방향을 전환시킨다는 허진호 감독의새 영화 ‘봄날은 간다’ 등도 하반기 흥행이 기대되는 상업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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