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할아버지로부터 호랑이 얘기를듣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달이 너무 밝아곧 해가 돋으려나 하고 한밤중에 밭에나가 김을 매고있는데 무슨 큰짐승이 밭이랑사이로 휑하니지나 가더라는 것이다.설마 하고계속 김을 매노라니 이번엔 반대쪽을 향하여또 무언가가 바람을가르며 스쳐 가더란다. 순간섬뜩한 예감이 들어사방을 둘러보니 들판저 끝 솔밭에불빛 두 개가이글거리며 밭쪽을 내다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비로소당신이 김을 매기시작하신 지 두어시간이 족히 흘렀건만 동틀 기미가 보이지않는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서둘러 낫이랑 호미를챙겨 솔밭 길을 헤치며거의 3㎞나떨어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무거운발자국 소리가 뒤를따르더라는 것이다.
가끔씩 흙모래가 언덕을 타고 내려와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고한다. 나는 이얘기를 적어도 열 두번은 청해 들었다. 매번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남한 땅에서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전의일이다.
할아버지의 호랑이무용담은 그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옛날 대관령기슭을 배경으로 한다. 나도어려서 산너머 큰댁에서 해가 지도록 놀다어두운 솔밭 길을 따라집으로 돌아올 때면혹시 호랑이를 볼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늘가슴을 졸이곤 했다.
삼촌들 꽁무니에 바짝 붙어걷는 덕에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그 신비의동물을 내 눈으로직접 보고 싶다는생각이 더 컸던것 같다.
경상북도 청송 사람들도 요즘 호랑이 얘기로밤을 지새는 모양이다. 한동안 호랑이를 보았다는 마을 사람들의 소문이자자하더니 드디어 어느방송사에서 설치한 무인카메라에 어슴푸레 호랑이 비슷한동물의 모습이 찍혔다.
러시아에서 호랑이 전문가들까지 초청하여 잠정적으로나마 호랑이일 것같다는 판정까지 받았으니 그 흥분이 오죽하랴.
그러나 지금까지 제시된 증거들로는 호랑이일 가능성은 사실상희박하다. 그리고 토끼나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걸 예로 들며청송 지역 산야에는 호랑이의 먹이가 될만한동물들이 풍부하다는 얘기를덧붙였지만 생태학적으로 전혀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논의를 위해이 문제의 동물이진정 호랑이로 밝혀진다고 가정해보자.절멸한 지 50년이 넘도록어떻게 홀로 살아 남았는가는 잠시 흥미로운 뉴스거리는 될 망정 생태학적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는일이다.
자생능력을 갖춘개체군이 살아 남아 있는것도 아니고 그저한 두 마리가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라져가는 한 동물의쓸쓸한 마지막 뒷모습을 보는 것에 지나지않는다. 호랑이 한두 마리 정도는동물원에도 있다.
유명한 생태학자의 이름을딴 앨리효과(Allee effect)라는 생태학개념이 있다. 어느 동물의개체군 크기가 너무작아지면 먹이도 함께찾을 수 없고포식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수 있는 능력도상실하며 심지어는 암수가서로를 만날 수있는 확률이 낮아져번식도 어렵게 된다는것이다.
오래된 개념이지만 오늘날 보전생물학자들에 의해다시금 새롭게 그의미가 부각되고 있는이 이론에 따르면, 어느날 갑자기 절멸위기에 놓인 동물 몇마리를 찾았다고 해서기뻐 날뛰는 것은성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수준의 개체군을 발견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있다.
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의 괴물에 얽힌 설화는너무도 유명하다. 얼마 전에는지진과 같은 지각변동 때문에 자칫 그럴듯 해 보이는증거들이 가끔 나타나는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괴물을 찾기 위해그야말로 평생을 바치는이들에겐 여간 맥 빠지는 연구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공룡이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감춘 지가 어언 6,000만년 이건만 도대체 어떻게 그사촌이 홀로 그오랜 세월을 그 곳에서 살아왔다고 믿을 수있단 말인가.
한 마리를찾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 호수 속에아직도 한 개체군이 버젓이 서식하고 있으리라 믿는 것도 아닐테고 보면 도대체수명이 얼마나 긴파충류이기에 아직도 살아있단 말인가.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식하고 있는 야생호랑이 개체군도 앨리효과의 깊은 수렁에 빠졌을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자기행동권 안을 아무리돌아다녀도 다른 호랑이의 그림자조차 볼 수없는 지경으로 그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 한군데 할퀴어 놓지않은 곳이 없는마당에 이제 와어느 산모퉁이에서 겨우호랑이 한 마리를찾았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환경이 원시그 자체라며 자랑할수 있는 것은결코 아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백 마리가있는데 그 중에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두고 그 잃은것을 찾아다니지 않느냐” 하신그리스도의 마음이라면 모를까, 그저한 마리 남아있을까 말까 한것을 찾았다 하여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올일은 아닌 것같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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