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파업 59일째인 태광산업의 울산 남구 선암동 18만평 공장. 아크릴사 생산공장라인은 AN(아크릴원료)이 무더기로 원사제조 기계에 물린 상태로 엉킨 채 멈춰서 있다. 뿌연 먼지에 뒤덮힌 기계들과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1,000여평의 공장내부는 공포영화의실내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붉은 티셔츠의사수대와 900여명의 근로자들은 한낮 더위를 피해 대형 텐트 밑에 누워있고 원사를 실어나르던 장비들은 공장 한켠에서 녹슬고 있다. 노조의장기 파업으로 9일 현재까지 집계된 태광의 매출 손실액은 하루 47억원 씩 총 2,649억원.
화섬 공장의 2개월째 파업으로 프로필렌과 AN, PTA(폴리에스테르 원료) 등을 생산하는 태광의 석유화학 공장 조업이 덩달아 중단됐고 부산, 구미공장 등 12개 공장과 6개 계열사의 8,000여명 종업원도일손을 놓았다.
1,200여개에 달하는 전국의 거래처들도 하나둘 등을 돌릴 조짐이고 1,000여개 하청업체의 연쇄부도도 잇따를 전망이어서 울산 뿐 아니라 부산 경제에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우려가크다.
태광산업 노조는 회사측이 설비감축을 이유로 생산직에 대한 명예퇴직을 실시하자구조조정에 반발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 간부 송병진(宋柄鎭ㆍ30)씨는 “조정절차를 거치지않은 불법파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회사측이 사전 예고 없이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데 가만히 두고 볼 노동자가 어디 있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사측은 “회사가 29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주고 최대 507명까지 희망퇴직을 받겠다고 했지만 노조측은 ‘해고 불가’ 방침만 고집한다”며 “회사문 닫고 2,000여명이 실업자 되는 것보다 구조조정을 통해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미로속 화섬업계
국내 화섬업계는‘비상구 없는 미로’ 속에 갇혀있는 형국이다.
국내 대부분 제조업계가 그렇듯이 중국과 동남아 국가의 추격,공급과잉에 따른 수출감소,통상마찰등 난마처럼 얽힌 안팎의 악재로 성장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
1990년대초 세계적인 화섬 호황과 중국특수에 따라 앞다퉈 생산 설비를 대거 늘렸던 화섬업체들은 외환위기에 따른 과다한 금융부담에다 세계경기 하락으로 수요가 줄어들면서 허덕이기 시작했다.
화섬협회 15개 회원사 가운데 대하화섬은 지난해 파산했고,고합새한 동국무역(워크아웃),한일합섬(법정관리) 금강화섬(화의)등 6개 굵직한 회사가 부실 꼬리표를 달고 있다. 그나마 수익성이 좋았던 기업들조차 올들어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다. 작년까지 흑자를 냈던 태광산업은 올해 1,400억원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고,효성 울산공장도 나일론 분야에선 한해 2000억원의 이상의 적자를 보고 있다.
당연히 구조조정이 불가피했지만 이에 반발한 노조의 파업으로 지난 5월이후 효성,태광,고합 등 3개사는 장기파업에 휩싸였다. 태광산업은 2개월째 파업으로 생산 기반이 붕괴될 위기에 놓여있고,파업 도미노에 불을 당겼던 효성은 공권력 투입으로 파업은 끝났으나 노조와 경영진 간의 팽팽한 긴장과 공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살풍경은 여전하다. 최근 60여일간의 지루한 파업을 마무리한 고합도 채산성 악화와 구조조정 부진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화섬업계가 처한 외부환경은 더욱 심각하다. 수출단가가 계속 하락해 폴리에스테르-나일론 제품은 최대호황이던 95년데 비해 50%가 가까이 떨어졌다. 세계 화섬 수요는 지난해 말 2,823만 2,000톤인데 반해 공급능력은 3,390만톤으로 무려 567만톤이 남아돈다,.
더구나 우리 업계가 목을 매는 주력 수출 시장인 중국의 화섬 생산량이 95년 320만 2,000톤에서 작년 690만톤으로 2배 이상 늘어났고 급기야 중국산 화섬원사가 국내로 역수입되기 시작됐다. 최대 수입시장이던 중국이 '자급자족'으로 돌아선데 이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은 저가 공세로 한국업체의 수출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일본은 물론 인도 멕시코,심지어 중국까지 한국산 화섬제품에 대한 덤핑조사를 실시하기로 하는등 수입규제의 장벽을 높이고 있어 갈길 바쁜 국내 업체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반면 국내 화섬업계 생산직 근로자들의 임금은 97년과 98년을 제외하고 매년 두자릿수 인상으로 95년 이후 50%정도 올라 생산성면에서 동남아국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원호 화섬협회장은 "화섬업계에 공멸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며 "노사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고는 누구도 생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총부채 12조원 고강도 구조조정 시급
위기에 몰린 국내 화섬산업을 살리기 위해 업계는 2005년까지 30% 감산,5년간 현재 고용인원(1만5,000명)의 3분의 1 수준인 6,000명 감원,20년 이상 노후설비 폐기,자산 매각을 통한 과도한 부채 해결 등 고강도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고 있다.
국내 화섬업체들의 총 부채는 지난 해말 기준으로 12조5,931억원. 이 중 8조1,488억원이 금융기관 차입금이다. 그러나 화섬업계의 지난 해 경상이익은 1조4,272억원 적자인데다 영업이익은 3,808억원에 불과해 금융기관 차입금리를 10%로 가정할 경우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자산매각 자구노력을 통한 부채 상환과 워크아웃을 통한 부채탕감 및 출자전환에도 불구하고 한일합섬 고합 새한 금강화섬 등 영업이익을 개선 가능성이 낮아 생산설비 인수와 인수합병등 강력한 구조조정 없이는 회생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김호섭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