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매는배낭이 유행한지 꽤 오래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에 양복 차림에 배낭을 매고 강의를 다녔는데 학생들도 쳐다보았고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도 조금의아한 표정을 짓곤 하였다.하지만 이제 배낭은 대중화되어 학생들부터 아저씨 아줌마까지 많은 사람이 매고 다닌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배낭문화는 전혀 형성되지 않은 것 같다.
지하철을타면 보통 사람이 많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타는 사람이 계속 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아지면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사람들이 양쪽으로 늘어서게되면 가운데 통로는 좁아진다. 그 좁아진 통로를 지나가거나 그곳에 서 있고자 할 경우 배낭 때문에 무척 곤란하게 된다. 배낭이 돌출 되어 있기때문에 공간이 그만큼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낭을맨 사람은 무신경하게 뒤돌아 서 있다. 그런 배낭이 한둘이 아니므로 매우 불편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입장이 바뀌는 것이 다반사인데도 아무도 어깨에맨 배낭을 벗어서 무릎 밑에 들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신도 불편을 느끼는 데 남의 불편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몇 년째 반복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만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배낭을 매고 있다.
왜 사람들은좁은 공간에서 배낭을 벗지 않아 자신과 남을 불편하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면안 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없다.
버스에서 큰 소리로 휴대폰을 받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고 땀 냄새를 풍기면서도 땀도 닦지 않고 옆 자리에바지 한 쪽 걷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자주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두 사람이 앉는 좌석일 경우 다른 사람에게 무릎이 닿을 정도로 다리를 뻗고 앉는아저씨들도 많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공공의식이란 남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공공의식부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산업화하고 근대화하여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의식은 여전히 가족 단위·집성촌 단위에 머무르고 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이나 추석에 일가 친척이 모이면 서열을 엄격히 따지면서 버릇이 있니 없니 말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집을 나서면문제는 달라진다. 모르는 사람이면 신경 쓸 것이 없다. 일가 친척이 아니고 동네 사람이 아니면 내가 편하면 그만이다. 남은 나의 관계 속의 사람이아니다. 따라서 버스에서 휴대폰으로 큰 소리로 통화할 때 옆 사람이 뭐라고 한마디하면 바로 적대 관계가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관계영역에 포함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족 단위와집성촌 단위가 확대된 것이 혈연과 지연이다. 혈연과 지연이 지배하는 이 사회는 결국 자기편과 적만이 존재하는 전쟁터이다. 자신의 편이 아닌 사람은모두 적이다. 자신의 관계 속에 속하는 사람만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지금 우리 사회를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다. 정부와 신문사, 신문사와 방송사, 신문사와 신문사가 대립하고 있다. 대립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는 아무문제가 없다. 그것은 견제와 균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사람이 불편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배낭을 내려놓지않는 것과 흡사하다. 배낭을 내려놓으면 서로가 편하다. 자기의 편이 아니라고 해도 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편해질 것이다.
/탁석산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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