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는 한 노동자의 죽음과 함께 동이 터 또다른 노동자의 죽음으로 저물었다. 1970년 11월13일 스물두 살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다.그리고 1979년 8월11일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에서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투신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전남 광산군에서 태어난 김경숙은 15세에 서울로 와 봉제 공장 미싱사로 일하다가 1976년에 YH무역에 입사해 이듬해 3월 이 회사 노조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1966년 장용호라는 재미동포가 자본금 1백만원, 종업원 10명으로시작한 YH무역은 가발 수출의 호조로 1970년에는 수출 실적 1백만달러, 종업원 4천명의 국내 최대 가발업체가 됐지만, 김경숙이 다니던 시기에는 석유파동이 가져온 전반적 불황과 선진국의 가발 수요 감소로 사세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러자 소유주는 백화점ㆍ해운업계로 진출을 꾀하면서 그 자금을회사의 은행 부채로 충당하는 한편, 가발과를 두메산골로 옮기는 수법으로 노동자 수백명을 해고했고, 마침내 1979년 8월6일 폐업 공고를 낸 뒤일방적으로 폐업절차에 들어갔다.
폐업에 반대하며 공장에서 농성하던 YH 노동자들 가운데 187명은 더 안전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에 알리기 위해 8월9일 신민당사로 찾아갔다.
이틀 뒤인 11일 새벽2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세 번 울리는 것을신호로 경찰 2천여명이 신민당사에 난입하면서 시작된 진압작전은 23분만에 신민당 국회의원과 당원 30여명과 취재기자 12명, 경찰 30명 그리고 노동자 수십명에게 부상을 안기고 끝났다.
김경숙은 왼팔 동맥이 끊긴 채 당사 뒷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이 YH사건은 그 해 10월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며 박정희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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