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모른다 / 김승희 엮고 지음ㆍ마음산책 발행시를 노래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순결하거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폭행당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아이를 낳으면서 신음하고, 밥상을 부수면서 부르짖는다.
그 자신 시인인 김승자(49) 서강대 교수는 여성시인 29명의 시에서 남성중심 사회의 억압을 폭로하는 여성의 외침을 들었다.
그는 이들의 시가 “가부장제 문화가 제공하는 여성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수동적으로 부여받았던 자의식의 분열에 맞닥뜨리는 것”이라고보았다.
김 교수가 엮고 지은 에세이 ‘남자들은 모른다’는 희생과 고통을 노래하는 대신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단호하게 거절할 것을 결심하는 여성의 선언문이다.
44편의 시에 대한 설명은 사회학ㆍ정신분석학적인 지식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난해하지만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 정신이 뚜렷하고, 그가 엮은 시들은 문제 의식으로 빛난다.
정신분석학에서‘아버지’는 지배 권력을 상징한다. 오랫동안 숨죽였던 여성 시인들은 1960년대를 전후해 ‘아버지’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용기있게 분출하기 시작했다.
1958년 출간된 시집 ‘거상’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아빠’를 향해 절박하게 내뱉은 욕설은 억눌렸던 여성이 얼마나 날카롭게 분노의 칼을 벼려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아빠’)
플라스는 영국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했지만, 어둡고 야성적인 남편은 아내의 재능을 갉아먹었으며 극도의 신경쇠약에 빠뜨렸다. 플라스는 세번째 자살을 시도한 31세의 겨울날 세상을 떠났다.
시인 양선희는‘더럽고 비천한’ 여성성을 무기로 삼아 ‘아버지’를 능멸한다.
‘아버지가 캑캑 기침을 하신다. 택시 창문을 닫아드려도 줄줄 눈물을 흘리신다. 건네드린 손수건과 물휴지도 무용지물이다…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나는, 착용감이 좋아 기분이 상쾌하고 흡수력이 기적적인 생리대 뉴 후리덤을 꺼내서, 아버지 얼굴을 덮어드렸다.’ (‘노상에서의 휴일’)
생리대는‘부정한 것’으로 시체와 배설물, 구더기와 나란히 놓인다. 김승자 교수는 “온순하고 정결한 여성 육체가 되기 위해 생리혈은 철저하게 외설에 부쳐져 왔다”고 말한다.
시인은 한참을 망설이지만 마침내 부정하고 외설적인 여성성을 꺼내들어 지배 권력의 얼굴에 올려놓는다.
한편으로 여성 시인들이 후벼내는 것은 남성중심 사회의 깊은 뿌리다. 최영미는 ‘어떤 족보’에서 ‘끝없이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이상한 성경 족보를 들추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어떤 족보’)
김 교수는 ‘어머니(mother)’의 영어 단어가 ‘물질(matter)’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 주목한다. 그는 “성서의 부권제 신화 속에 살과 피의 모태인 어머니가 단순한 물질로 격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성을 부속물로 간주하는 남성중심 문화는 김 교수 자신이 시로 쓴 한국의 상황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상준(골드라인 통상 대표), 오희용(국제 가정의학 원장), 손희준(남한 방송국),김문수(동서대학교수) 씨 빙모상=4일 오후 삼성 서울 병원. 발인 6일 오전 5시.’ (‘한국식 실종자’) 시인은 어머니가 죽었지만 신문의 부음란에 이름을 낼 수 없는 한국여성의 현실을 탄식한다.
김 교수는 여성의 시에서 솟아오르는 삶의 체험을 발견했다. 여성은 육체를 상품으로 삼고 제도로서의 결혼에 종속되며, 가사 노동에 얽매이고 고통 끝에 아이를 낳는다.
남편이 아니라 집과 결혼한 가정주부를 한탄하는 앤 섹스턴(‘죽음의 아이’) 남성의 겁탈을 노래한 예이츠의 시를 뒤집으면서 성폭력에 저항한 준조단(‘여자 그리고 남자의 침묵’), ‘하나님-아버지’보다 ‘하느님-어머니’를 생각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를 외친 시인 고정희(‘땅의사람들8’)에게서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김혜순 시인은 어머니가 딸을 낳던 날을 노래했다.
‘흰옷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딸을 낳던 날의 기억’)
여자들의 이 처절한 고통을 남자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이 여자에게서 나왔고, 당신에게서 여자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 김지영기자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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