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즘(lookism)’.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가 인종, 성, 종교, 이념 등에 이은 새로운 차별 기제로서 ‘외모’를 지목해 사용한 용어다. 용모가 개인간 우열과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로 부각되고 있다는 의미.그러나 정작 루키즘, 또는 외모차별주의가 극단화하고 있는 곳은 우리 사회다. 잘난 외모는 경외의 대상이 되고, 못난 외모는 공공연히 비하의 대상의 된다. 이런 풍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모 가꾸기 광풍에는 남녀노소도 따로 없다. 사회 전체가 더 이상 ‘개성’과 ‘인격’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집단 ‘몸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 내면보다 보이는 게 중요하다?
최고 명문대 출신의 의사 L씨(30·여). 모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20여 차례나 선을 봤지만 한번도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했다. 작은 키와 통통한 체형이 이유. 조건만 본 남성들로부터 계속 제의가 들어오지만 더이상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역시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K씨(27)는 학창시절 친구들에게는 ‘전설’이었다. 만점 가까운 학점과 토익점수, 현지 연수를 통한 유창한 회화실력 등….
하지만 그는 모든 유수기업의 면접에서 모조리 탈락했다. 왜소한 체격과 어리숙한 인상때문임을 아는 K씨는 뒤늦게 공무원 시험준비를 시작했다. 없어져야 할 '용모단정’이란 구인조건이 오히려 남성 구직자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커플매니저 A씨는 “성격은 알아서 맞출 테니 외모만 맞춰달라는 게 회원들의 요구”라며 “외모가 떨어지면 직업, 학벌이 아무리 좋아도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이제 외모는 계층구분 표식으로까지 인식된다. 성형수술을 받고, 정기적으로 피부관리를 하고, 헬스클럽에서 몸매를 가꾸는 일은웬만큼 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전선애 팀장은 “‘명문가팀’ 고객의 용모가 일반회원들에 비해 빼어나다”며 “자신에 대해 아낌없이 투자한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 강박증 수준에 달한 몸 가꾸기 열풍
이런 상황이니 몸 가꾸기가 생활이 돼버린 이들로 주변이 온통 넘쳐나게 된건 당연한 일. 누가 봐도 멀쩡한 사람이 어느날부터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막대한 돈과 시간을 몸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정신과에서 말하는 ‘신체변형 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다.
자동차 영업사원 박모(32)씨는 매일헬스클럽에서 서너 시간씩 땀을 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월간 단위로 빽빽히 몸 관리 계획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미 얼굴 점을뺐고, 피부 박피술도 했습니다.
한달에 두번 쯤은 전문 피부관리를 받아야 고객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지요. 매일매일 더 나아진 듯한 외모를 확인하는 즐거움은 모를 겁니다.”이 정도면 거의 ‘아도니스 콤플렉스(남성 외모 집착증)’ 수준이지만 젊은 직장인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서울 강북구 모 성형외과 원장 H씨는“병원을 찾는 5명중 1명은 필요가 없거나 기대효과가 희박한데도 수술을 우기는 성형 콤플렉스 환자”라며 “심한 경우는 정신과 진료를 권유하고 있다”고전했다. “한 2년 전부터 부쩍 이런 현상이 심해졌습니다.
방송 등에서 부각되는 얼굴은 갸름하고 눈 크고 코 오똑한 서구형이잖아요. 턱선이 강하고 광대뼈 나온 우리와는 차이가 크죠. 당연히 칼을 댈 부위도 많고 수술도 여러 번 해야 하니 성형외과가 번성하는 겁니다.”
■ 효과야 어떻든 막무가내
‘키 크는 약’이 한달 100만원이 넘는 값에 팔려나가고, 1년에 1,000~1,500만원짜리 성장호르몬 주사가 유통되는가 하면, 온갖 비방이 판을 친다. 그러나 서울정형외과 문호생(文鎬生)원장은 “약물이나 운동처방은 뼈의 성장판이 닫히기 전 청소년에게나 효과있는 프로그램”이라며 “성인의 눌려있던 관절 사이를 체형교정으로 펴봐야 1cm 쯤 커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얼굴을 작게 한다’는 경락 마사지는이른바 ‘얼큰이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 얼굴 림프선을 지압해 일시적으로 부기(浮氣)를 빼주는 방식에 불과한데도 업소는 늘 호황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머리숱을 늘리기 위해여성호르몬을 장기 투여하는 무모한 남성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모 대학원생 P(26)씨는 “넓은 이마 때문에 고민하다 어디서 얘길 듣고 온 어머니의권유로 6개월째 여성호르몬제를 쓰고 있다”며 “주변에도 나 같은 경우가 꽤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실 거울을 볼 때마다 여자처럼 가슴이 나오는 건 아닌지, 결혼도 안했는데 앞으로 부부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지 걱정이 많다”고 덧붙였다.
외모와 생명을 바꾸는 일은 더 이상뉴스도 아니다. 올해 5월에도 70kg가 넘는 체중감량을 위해 3년이나 변비약을 상복해온 부산의 S(22·여)씨가 숨졌다. 당시 몸무게는 고작 43kg.
한국소비자 보호원에 접수된 다이어트식품 관련 피해도 1998년 271건에서 지난해 600여건으로 급증하고 있지만, ‘먹고싶은 음식을 먹으면서 단시간내 체중감량”과 같은 허황한 광고가 여전히 먹혀들고 있다.
■ 세대를 넘어 확산되는 외모 지상주의
성형외과와 피부과는 방학이 대목이다. 지 앤 미 피부과 장경애(張慶愛)원장은 “방학이 되면 주근깨, 여드름등을 제거하기 위해 레이저시술 등을 받는 10대들이 크게 늘어난다”고 귀띔했다.
이 병원을찾은 박모(17ㆍ고2)양은 “공부 잘 해도 외모가 딸리면 친구 사이에서 ‘짱’이 될 수 없다”며 “생일이나 성적이 올랐을때 부모에게 성형수술이나 피부관리를 요구하는 게 유행”이라고 전했다. 점 제거레이저 시술을 받으러 온 한 학생(18)은 “가을에 졸업앨범을 찍는데 나중에 애인이나 신랑한테 원래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렀다”고 말했다.
이런 이상열풍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 황규혁(黃圭爀)박사는 “체면, 외모,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짙은 우리문화 탓도 크다”며 “여기에 자본주의적 상업성이 더해져 걷잡을 수없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미국에선 "입사원서에 사진도 안붙여요"
영어강사 크리스 게일(27ㆍ여)씨는 “미국에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얼굴 사진을 붙여본 적이 한번도 없다“며 “업무 수행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면 되지 외모나 나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성형수술은 모델ㆍ영화배우 지망생 같은 일부 계층에 국한돼 있고 성형의원도 베벌리힐즈 같은 특정지역에나 있다”며 “한국여성들이 성형의원을 들르는 것을 미용실에 가는 것처럼손쉽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고 놀랐다”고 덧붙였다.
미국인들도 외모에 대한 관심은 크지만 취직이나 결혼에서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해 성형수술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사회가 모든형태의 차별(Discrimination)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모보다는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
마이크로소프트코리아의 권찬(權燦ㆍ37) 홍보부장도 “미국인들의 외모 기준은 오히려 조깅 등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매”라며 “외모에 가장 관심많은 여대생들에게서도 화장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고 우리의 유난스러운 풍조를 꼬집었다.
미국인들의 실력우선주의는 대중문화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상대를 편하게 하는 매너와 말솜씨로 정평있는 ‘토크 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에게 예쁘지 않은 외모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노래를 못해도, 연기 실력이 떨어져도 얼굴 하나만 반반하면 깜짝 스타가 되고, 40대 여성 앵커나 프로그램진행자를 찾아 보기 힘든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지난해 성형수술비 5,000억원"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4월말 현재 전국 성형외과 의원수는 467개. 작년 같은기간에 비해 13.6%나 늘었다.
이 기간 전체 의원 증가율의 4배나 된다. 성형외과 전문의 배출도 75년 22명에서 99년 847명으로 약20년 사이에 38.5배나 늘었다. 이는 전체 전문의 증가율에 비해 5배이상 높은 수치다.
그렇다면 미용성형을 통한 ‘아름다움의 의료화’가급속히 진행되면서 이른바 ‘나이프 스타일(knife-style)’을 구현화하는데들어가는 돈은 얼마나 될까.
미용목적 성형수술은 대부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데, 지방흡입술은 부위에 따라300만~500만원, 쌍꺼풀 80만~120만원, 코 높이기 100만~150만원, 유방 확대수술 500만~700만원, 사각턱이나 광대뼈를 잘라대는 윤곽교정술 500만원 등이다.
그러나 비용은 의사 지명도에 따라 2배 가량 차이나고 개인전문병원이 대학병원보다 1.5~3배 가량 비싸다.
대한성형외과 개원의협의회는 “지난해 성형외과의 총매출액은 1,700억원이나 피부과 등에서 행해지는 수술까지 감안하면 전체 성형수술비용은 최소 5,000억원에 달할것”라고 추정했다.
미용성형 관련 파생상품 시장의 신장세도 놀랍다. 주름제거용 약품인 B주사액을 독점 판매중인 D제약은 이 제품 하나로 지난해 6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98년까지 10여개에 불과했던 성형수술기기나 초음파 지방흡입기 등 성형관련 제품을 취급하는 업체도 급증, 현재 70여개에 달한다.
H메디컬 관계자는 “유방보형물과 코성형 삽입물 시장 규모만 각각 100억원대를 넘는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미용성형 외에도 다이어트식품, 비만 체형 피부관리실 및 헬스 센터 등 몸 관리를 위한 비용까지 모두 합치면국내 외모산업 시장이 연간 1조원은 족히 넘을 것으로 보고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외모 콤플렉스 부추기는 TV
지난달 22일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건강보감 코너. 얼굴이 크고 둥글어 ‘호빵맨’으로 불리는 공동진행자 개그맨 김용만씨는 “가까이서 보면 더 커 보인다”는 등 동료의 조롱을 받으며 시술대에 누웠다.
김씨의 얼굴에 침 두어대가 놓아진 뒤 출연진은 “얼굴이 진짜 작아졌다”며 환호성을 올렸다.그전 주 방송에서는 복부 비만 측정에 나선 개그우먼 박미선씨에게 “기계가 깨질 뻔했다”는 놀림이 쏟아졌다.
역시 지난달 3일 SBS ‘두남자쇼’의 ‘게임&벌칙’ 코너. 게스트 K씨는 머리서부터 유아복을 끼워 입으라는 벌칙을 받았다. 사각진 큰 머리를 가진 K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우스꽝스런 모습을 연출했음은 물론이다.
Y씨는 각종 쇼 프로그램에서 작은 키를 활용(?), 팔등신 진행자를 더욱 돋보이게하는 역할을 한다. 툭하면 자신의 짧은 다리를 ‘비하’해 실소를 유도한다.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 등 ‘비정상적인’ 팔등신 미녀들에 의해 지배되는 브라운관이 일반 시청자들의 외모 콤플렉스를 자극한다는 것은 이미상식적인 얘기. 하지만 요즘 방송 출연자들은 더 나아가 걸핏하면 상대방의 외모를 갖고 장난치거나 심지어 집단적으로 ‘이지메’까지 하는 잔인성을 보인다.
K대 대학원생 L(28)씨는 “출연자들이 외모를 화제삼아 상대를 조롱하는 모습은 정말 천박스럽고 역겹다”며 “한마디로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쏘아 붙였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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