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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5)혁명의 권총 마우저 C96-극작가 하이너뮐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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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5)혁명의 권총 마우저 C96-극작가 하이너뮐러 (상)

입력
2001.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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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봄 세족(洗足) 목요일 아침, 한 남자가 독일 칼스루에 부근자신의 집 앞 감청색 벤츠 관용차에 몸을 실었다.차는 곧 그의 근무지인 연방경찰청으로 향했다. 그는 당시 독일연방 검찰총장인 지그프리드 부박이었다.

근무지로 가는 도중 한적한 도로에서 교통신호가 적신호로 바꾸었다. 운전기사는 차를 멈췄다. 순간 차 오른쪽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섰다.

올리브그린의오토바이용 모자를 쓴 두 사내가 스즈키750GS에 앉아 있었다. 순간 오토바이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능숙한 솜씨로 여행가방으로부터 짧게 접혀진소총 칼리버223을 빼들었다.

이 무기는 주저없이 부박의 관용차를 향해 불을 뿜었다. 암살자의 총구는 적어도 열다섯번 불을 뿜었다.

확인사살 후암살자들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유유자적 그 현장을 떠났다. 부박과 그의 운전사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부박의 암살 직후 당시 서독 10개의 신문사 편집부로 암살자들의 직접 서명이든 문서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암살에 사용했던 최신형 오토바이 대여증서 복사본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행한 그 끔찍한 암살에 대해"검찰총장은 우리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썼다.

마치 직업살인자들처럼 최신형 오토바이에 앉아 동요없이 열다섯번 이상 소총을 쏘아댄그 암살자들은 역사학도, 철학도, 택시기사로 구성된 3인의 도시게릴라였다.

이들은 1968년에 결성돼 도시게릴라 운동을 선언하며 근 30년간 독일과온 세계를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바더마인호프그룹 즉 ‘독일 적군파’의 일원이었다.

조국인 서독정부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며 극좌파 무장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 전사’라고불렀다.

우리가 방금 작별한 20세기는 그야말로 혁명의 세기였다. "다시는살인과 억압이 없는 내일을 창조하기 위해 오늘은 다른 인간을 살해해야만 하는 모순의 불"인 그 혁명 속에 뛰어든 세기가 바로 20세기였다.

1905년 정월 러시아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로부터 시작해 서독의 도시게릴라 적군파에 이르기까지 혁명은그야말로 20세기의 풍토병이었다.

특히 전 공산권을 휩쓴 혁명의 소용돌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레닌, 트로츠키, 마오쩌둥,로자 룩셈부르크, 카스트로, 그리고 요즘 유럽 젊은이들의 티셔츠에 새겨져 내다 팔리고 있는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에 이르기까지 20세기는 그야말로혁명 전사들의 격납고였다.

혁명 전사. 그들은 과연 암살자인가, 심판자인가. 사회주의 혁명의 절정에있던 구동독 한가운데서 바로 그 혁명에 대고 이렇게 정면으로 질문한 사람이 있다. 브레히트 이후 가장 주목할만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독일극작가하이너 뮐러가 그이다.

그는 서독에서 적군파가 결성된 직후인 1970년 발표한 희곡 ‘마우저’에서 혁명이란 과연 무엇인지, 혁명 전사란 혁명의 광기 속에서 한자락 소모품은 아닌지 집요하게 묻고 있다.

동독 건국20년 후 동독과 공산주의 전체의 불문율이었던 ‘혁명의 신성’에 감히 신성모독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마우저란 지금은 애호가들의 수집품이 된 암갈색의 타원형 손잡이에 총신이 긴 권총 마우저 C96을 의미한다.

19세기초 볼셰비키혁명의 와중에서 러시아 직업혁명가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이 권총은 발명자인 독일인 형제의 이름을 따서 마우저로 명명되었었다.

여기 이름조차 없이 그저 A라고 명기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소련 비테프스크라는도시에 사는 소시민의 아들이다.

혁명 전 그는 성화 앞에서 성직자로서의 삶을 꿈꾸었고 일상이라고 해야 싸모와르 차 주전자와 목재 마루바닥에 둘러싸인그야말로 지극히 초식적인 삶이었다.

혁명의 물결이 닥치자 그는 어느날 문득 당에 의해 혁명 전사로 임명된다. 그 시의 혁명재판소 사형집행 담당자,즉 혁명 최전선의 전사가 된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해야 했던 일,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의 적을 죽일 수 없다고 고백한 자신의 선임자 B를 사형대에묶어 처형하는 것이었다.

혁명 전사 A는 혁명이 그에게 내린 명령, 즉 혁명의 적에게 죽음을 분배하라는 일이 그 시대가 맡긴 자기사명인 줄로 알고그 명령에 동의한다.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죽이는 일이 중단되기 위해 지금은 적에게 죽음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 그것이 혁명이다.

그러나 어느날 돌연 A에게 신념의 균열이 온다. 그의 손가락과 처형무기인권총의 방아쇠 당김 사이에 혁명의 회의가 자리잡은 것이다.

그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합법적 살해’에소스라치고 혁명이 자신의 손을 통해 죽인다는 사실에 전율한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처형한 전임자 B가 왜 더 이상적을 살해할 수 없었는지 이해한다. 그리고 적의 피로 손을 적시며 도달해야 하는 그 육식동물적 유토피아란 대체 어떤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하여그는 감히 신성하다는 혁명 앞에 금지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너희의 명령으로 죽였다. 난 더 이상 죽일 수 없다. 혁명은과연 승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혁명이 승리한다면 이 합법적 살해는 과연 중단될 것인가." 당은 합창단의 목소리로 대답한다.

"질문은너무 이르다. 혁명은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질문하는 자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 당은 곧 A의 후임자에게 명령한다.

"이혁명의 적에게 죽음을!" 혁명연구가 크레인 브린튼은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엔 점잖은 전쟁이나 점잖은 혁명 같은 것은 없는 법이다.혁명 속엔 운명적으로 폭력의 요소가 있다."

언제나 니카라과 산 혹은 하바나 산 진품 검은 시거를 피워대고, 블랙라벨위스키만을 마셨던 뮐러는 통독 5년 후인 1995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인은 지병인 식도암이었으나 직접사인은 당시 세 살짜리 딸 안나와제야를 보내기 위해 병원 외출 허가를 얻어 서둘러 탑승한 뮌헨 발 베를린 행 비행기에서 얻은 감염으로 인한 급성폐렴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인에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 그의 절친한 동료이며 후배작가인 크리스토프 하인이다. 하인은 ‘상처’라는짧은 글에서 뮐러를 사망하게 한 암종, 그것은 '구토'라고 썼다.

"그 구토라는 암은 오랫동안 참 넉넉한먹이를 얻었다"고 그는 탄식한다. 구 동독 극작가로서 뮐러가 일생 투쟁해야 했던 관리들, 권력들, 검열과 공연금지들에 대한 구토, 그리고통일 후 격렬한 실망감들이 구토라는 그의 병에 실컷 먹이를 대어주었다는 것이다.

하이너 뮐러는 1992년 발표한 그의 자서전 ‘전쟁없는전투’에서이렇게 쓰고 있다. "동독은 반파시즘, 반히틀러에 혁명을 통해 건국되었다.

그러나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우리는 보았다. 우리 국경수비대의 복장, 동작, 도보, 표정, 목소리가 히틀러의 군대들과 섬뜩하도록 동일하다는 것을."

카나리아 섬에 있는 출판인 라인홀드의 여름별장에서 훗날 엄청난 문학논쟁을일으키게 될 뮐러의 그 자서전 작업을 도운 것은 그의 제수이며 유명 여류작가인 카챠 랑에 뮐러였다.

/재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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