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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글과 책]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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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글과 책]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생’

입력
2001.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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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소설가 파스칼 키냐르(53)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세상의 모든 아침’의 작가다. 그가 98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발행)이 최근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기자는 이 책을 읽으며 내내 황홀했다.‘은밀한 생’을 딱히 소설이라고 말하기는어렵다. 그것은 소설의 옷을 얇게 걸친 에세이에 가깝다. 작품의 후반부 제32장의 전문(全文)은 이 책의 성격을요약한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하나의 몸인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었다.”

사유와 삶과 허구와 지식을 하나의몸 안에 뒤섞은 것, 그것이 ‘은밀한 생’이다. 이 소설의 중요한 등장인물은 화자와 M, 그리고 네미 샤틀레 셋이다.

M은 화자의 지금 애인인 듯하고,네미 샤틀레는 화자가 과거에 사랑했던 여성이다. 화자에게 음악을 가르쳐 준 네미는 이 세상에 없다.

네미 샤틀레라는 이름도 가짜라고 화자는 말한다.소설의 현실적 공간은 90년대의 이탈리아와 중국과 프랑스와 튀니지와 벨기에 등이다.

그러나 화자의 기억과 몽상 속에서 소설의 공간은 역사와 신화와일상을 넘나들며 동서고금의 구석구석으로 더 확대된다.

화자가이 작품에서 수행하는 명상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의 말들에 대한 것이다. ‘음경’과 ‘성교’에서 ‘욕망’과 ‘갈망’을 거쳐 ‘노출’과 ‘도취’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관련된 수많은 말들이 화자의 명상 속에서 언어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철학적으로 분석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명상 속에서 사랑은 죽음과 재생산에 이어져 있다. 작품 속에서 설명되는, 빼어난 미녀와 동침을한 뒤 사라져 버리는 누카르의 신화는 사랑이 죽음이나 재생산과 관계맺는 방식을 상징한다.

그린란드에서 전해내려오는 이 신화에서 누카르는 인간이기도하고 연어이기도 하다. 미녀는 어머니이자 모천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스토리도 아니고 저자의 박식도 아니다. 독자들의 넋을 빼앗는 것은 말과의 사랑이다.

실상 이 책 전체가 말과의 정사(情事)라고 할 만하다. 번역본으로읽어도 이리 맛이 있다면, 그 원본이 담고 있는 언어의 에로티시즘은 얼마나 자극적일까? 이 책은 서둘러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다. 두고두고조금씩 씹으며 읽어야 할 책이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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