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4일오전 4시경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서 한쌍의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바다에 몸을 던졌다. 남자는 극작가 김우진이었고, 여자는 성악가 윤심덕이었다.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 둘 다 1897년 생으로 향년 30세를 채 못 채웠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는 당시 조선 사회 전체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 최초의 성악가인 윤심덕은 오늘날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편곡한 ‘사(死)의 찬미’라는 대중가요의 가수로 알려져 있다.
김우진이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의 귀에 윤심덕보다도 오히려 더 설지 모른다. 그러나 김우진은 우리 근대적 공연 예술의 터를 닦은 사람이다.
김우진을 통해서 한국의 연극은 신파를 벗어나 세계 연극계의 시민권을 얻었다. ‘정오’ ‘난파’ ‘산돼지’ 등 희곡 다섯 편을 비롯해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 등 평론 30여편,시 40여편, 편지, 일기 등 김우진의 유고가 완전히 공개된 것은 1983년에 이르러서다.
김우진의 극적인 죽음과 관련된 온갖 풍문들이 그의 작품과삶에 대한 온전한 해석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는 유족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그 때 공개된 일기의 어떤 부분은 유교적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과 대결 의식을 드러내, 대뜸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연상시킨다.
전남 장성에서 대지주의아들로 태어난 김우진은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다니며 극예술협의회를 조직했고, 1921년 이 단체의 순회공연 중에 평양 출신의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학생 윤심덕을 만났다.
그때 김우진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의 재능과 사람됨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에는 세상의 편견에 맞설 근육질이 부족했던 것 같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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