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되면어느 때보다도 더남북관계의 개선에 대한기대감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가 분단국이라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관심은 동독문학에 대한관심으로 이어졌다.서독인들은 왕래가자유로웠던 반면 동독인들은 자국에 갖혀있다시피 했기에독일의 분단상황이 잘드러나는 것은 동독문학이었다.
그러나 80년대만 해도 동독문학 전체가우리나라에서 금서였고, 지금은 잘알려진 브레히트도 그때는출판되지 못했으며, 스위스 작가막스 프리쉬의 책마저마르크스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통관시비가 빚어졌다.
동독문학 중 서독에서 나온작품만 어렵게 구하여거의 다 번역을하다시피 정독을 했었다. 그무렵 유학을 다녀온지 10년 만에다시 독일에 갈기회가 있었는데 마침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직후였다. 그 때예상했던 대로, 독일은 통일이후로 갈 때마다놀라울 정도로 변해있곤 했다.
그리고이번에 와서 보니독일은 여러모로 예전보다 훨씬 더 여유있어 보인다.그런 지금 독일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간혹 통일 직후의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열렸을 때 수많은사람들이 손에 손에망치를 들고 그벽을 향했었다. 두터운 콘크리트 벽을 깨는 무수한 망치소리들이 만들어내던 아름다운 화음이 아직도 귀에쟁쟁하다.
어느 동독서점 앞, 기나긴 줄 가운데서 오늘부터 서독 책이 들어온다며 이제 여섯시간 째기다리는 거라면서 환히웃던 동독 청년의얼굴도 떠오른다.
장벽이 무너지던 해의 마지막날 밤, 샴페인을 한 병씩 든채 저절로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모여든사람들과 그 위로울려퍼지던 ‘환희의 송가’도 귀에 남아있다.
그러나 공식통일을 앞두고 경제통합이 이루어지던 전날,동독가게의 진열대는 텅비고 다음날 서독물건들로 채워졌다.
그 후구 동독지역에 갈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조그만 가게에서도 물감을 탄것 같은 음료수한가지 외에는 동독상품을 찾아볼 수없었다.
현지 경제는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순박한 구동독 노인의 말도마음에 남아있다. “주의는 다나빠요. 민족사회주의(Nazism), 스탈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평생의 삶의 체험이었다.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가졌었던 동독 지식인들의 이야기도 스쳐지나간다.“점령당한 것 같아요...”.
모든 분야에서 동독 지식인들의 ‘청산’이 이루어지던 무렵 한 중견학자는 이런 말도 했다. “아직은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있어요.
같은 일을하고 봉급은 적게받지요. 중요한 일은다 서독에서 온사람들이 하고요.” 그 말을하면서 베어빙켈씨는 동독비밀경찰이 다시 있기라도 한듯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었다.
물론 담장하나를 쌓으려 해도 평생자갈오기를, 모래오기를, 또 시멘트오기를 세월 없이기다리며 일하던 것이몸에 밴 구동독 사람들과 함께일을 하자면 구서독사람들도 답답했을 것이다.
특히극우파의 외국인 테러등으로 표출된, 전망이 없어진구동독 지역 젊은이들의 탈선은 남의 나라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통일 이후에 어떨까생각해보지 않을 수없었다.
아직은모든 것이 어렴풋한 상황인데 그 이후까지 생각하는 것은 성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 바라보는 시야또한 필요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정치적 통합이나 경제적 투자에는 많은관심을 가지고 있고, 통일이후에는 더더욱 그럴것이다.
그러나 우리모두가 무엇보다 관심을가져야할 일은 통일 ‘당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일것이다.
독일의 통일을바라보며 기행시집을 내기도했고, 또 독일의분단·통일 문학에 대해 두꺼운 책을 쓰기도했지만 결국 하고싶던 말은, 마음을 헤아리자는 것- 그 한마디였던 것같다.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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