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의 상상이란 이런 것이다. 2029년 어느날, 우주정거장에서 인류의 ‘종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연구하던 미국 공군대위 레오(마크 월버그)가 인간으로 훈련 받은 실험용 침팬지가 사라지자 소우주선을 타고 긴급 출동에 나선다.섬광과 블랙홀, 그리고 알 수 없는 행성의 원시 늪지대로 추락한다. 한 무리의 인간이 고릴라(유인원)에게 쫓긴다. 로마 병정처럼 갑옷에 창을 들고, 말을 탄 고릴라들. 이럴 수가! 끔찍한 ‘악몽’ 이다.
그 악몽은 단순한 질서의 전복만이 아니다.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인원들이 보여주는 갖가지 행태들이 어쩌면 ‘인간들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인간들의 모습과 너무나 같을까.
흑백 피부의 유인원이 존재하고, 백인 유인원이 지배자이고, 그들은 인간을 노리개로 판다. 그들은 인간을 “냄새나는, 더러운 그리고 난폭한 것들”로 부르고, ‘치명적인 병을 옮기는 존재’로 멸시한다.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고, 문화는 허리 밑으로만 발달했고 번식력만 4배나 높은 하등동물.^인간을 향한 야유는 지배자인 유인원의 세계를 통해서도 낱낱이 드러난다.
인간을 ‘덤핑’으로 팔고, 어린 소녀는 “크면 버려”야 하는 애완동물 쯤으로 여긴다. 인권보호단체를 맡고 있는 상원의원의 딸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와 강경파인 군부의 수장인 테드(팀 로스)의 갈등과 대립, 테드의 정치적 야심과 음모. 계엄령이 선포되고, 아리와 함께 ‘혹성탈출’을 시도하는 레오를 쫓는 테드의 군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맡는다”는 발상이 이 행성에서는 얼마나 어이없는 오만인가. “이렇게 하면 우리도 인간과 다를 바 없어. 인간도 가르치면 우리와 어울려 살 수 있다”는 아리의 말은 극단적인 조롱에 가깝다.
분명 33년 전 찰턴 헤스턴이 모래밭에 처 박힌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절망해 울부짖던 1968년의 영화와는 다르다.
33년 만에 다시 만든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의 인류문명에 대한 비판은 훨씬 직설적이고 자극적이며 강렬하다.
우울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통해 인간세계를 비웃고, 인간의 미래를 ‘악몽’으로 상상하는 팀 버튼으로서는 일종의 타협이다.
같은 소재지만 화려한 테크닉과 정교한 세트와 분장, 스펙터클한 액션으로 그는 한 편의 새로운 여름 오락용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냈다.
우주탐험을 떠난 원숭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인간(배우)들이 분장으로 연출한 유인원, 그들의 섬세한 표정연기와 스피디한 액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관습인 영웅주의를 섞어 2001년판 ‘혹성탈출’은 제작비 1억달러의 볼거리 가득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폴 버호벤과 스티븐 스필버그를 결합한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것이 너무나 의외로 커서 오히려 그 오락성을 폄하하고, 팀 버튼의 고뇌상실을 못마땅해 할 정도로….
그것을 모를 팀 버튼이 아니다. 그래서 준비한 재치있고 충격적인 마지막 반전. 그것이 33년 전의 것에 비해 다분히 장난기 가득하지만, 여전히 ‘혹성탈출’은 팀 버튼의 영화임을 말해준다. 8월 3일 개봉.
이대현기자
leedh@ hk. co.kr
■ 팀버튼 감독
‘할리우드 악동’ 팀 버튼(43) 감독에게 영화는 상상력이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은 동화적 환상이나 은빛 세계가 아니다.
‘가위손’ ‘배트맨’ ‘크리스마스의악몽’ ‘화성침공’ 에서 최신작 ‘슬리피 할로우’까지.
디즈니 에니메이터 출신인 이 괴짜 감독은 우화와 현재가 어우러진 미래를 상상하거나, 신랄하고 섬뜩한 동화적 세계를 꿈꾸거나, 진실과 가공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을 찾아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블록버스터면서도 B급 영화이고, 독특한 예술이면서도 오락이다. 그것이 때론 ‘화성침공’처럼 유아적 발상과 패러디로 치닫지만, 기발함과 우울함이 공존하는 그의 상상력은 분명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악몽’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마니아가 있다. ‘혹성탈출’은분명 그것에서 한걸음 물러나 그 ‘악몽’까지 가벼운 오락으로 탈바꿈 시킨 다소 ‘실망스런’ 작품이지만 그의 최고 히트작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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