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31일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이 처형됐다.향년 61세. 그는 그전해인 1958년 1월 진보당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간첩혐의로 기소됐고, 그 해 7월2일 선고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이듬해 2월27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오늘날, 학계에서나 정치권에서나 조봉암이 북한의 간첩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국민의 지지를 너무 많이 받았고, 그래서 당시 대통령 이승만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봉암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추진위원회 후보로 출마해 총투표수 900여 만표 가운데 216만여 표를 얻어, 비록 집권에는 실패했지만 보수일변도의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의 억압적 정치분위기와 여당측의 부정선거 기도를 고려하면, 그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그가 얻은 표이상이었을 것이다.
조봉암은 이 지지를 바탕으로 그 해 11월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진보당을 결성한 뒤, 당시에는 금기였던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면서그 구체적 방안으로 ‘국제연합 감시 아래의 남북한 총선거안’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 평화통일론을 꼬투리로 삼아 진보당을 해체하고 정적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교수대로 보냈다.
조봉암의 호는 죽산(竹山)이다. 1919년의 3ㆍ1운동 참가로 첫 감옥살이를 한 그는 일제 시대 내내 감옥을 들락거리며 사회주의 노선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공산당을 탈당하고 전향해48년에는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고, 50년에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돼 국회부의장에 선출됐다.
7월6일 그의 고향인 인천 강화읍 갑곶리의 진해공원에 지역주민들에 의해 ‘죽산 조봉암선생 추모비’가 세워졌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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