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7월30일 독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죽었다. 향년 83세.비스마르크는 독일이라는 국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그의 비범한 정치적 재능과 노력에 힘입어 독일은 통일을 이루고 그의 조국 프로이센은 독일제국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는 명석했지만 완고했다. 비스마르크는 일생을 반혁명 보수주의자로 일관했고, 그의 정치원리는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쇠와 피를 통해 결정된다”는 철혈정책으로 요약됐다. 47살때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면서 그 취임연설에서 피력한 이 철혈정책 때문에 그는 흔히 철혈재상이라고불렸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관리가 된 20대 이후 늘 독일의 통일과 번영에 마음을 쏟았다.
러시아 주재 대사, 프랑스 주재 대사 등을 거치며 국제정치의 안목을 넓힌 그는빌헬름1세의 프로이센 총리로서 군비확장을 주도하며 이웃 열강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1870~18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독일의 통일을 이루고 독일제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통일 뒤에는 이제 유럽의 평화가 독일에 중요해졌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유럽 각국과의거미줄같은 동맹을 통해서 숙적 프랑스를 고립시키려고 애썼다.
국제정치에서 탁월함을 보인 비스마르크는 그러나 국내정치에서는 많은 난관에 부딪쳤다.그는 남독일 바이에른주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해 1872년 이후 반-가톨릭교회 투쟁 곧 ‘문화투쟁’을벌였지만 교회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했고, 사회주의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는 한편 건강ㆍ양로보험등 사회정책을 추진했지만 독일의 사회주의세력은 더욱 더 번성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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